[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농담 아니라, ‘정말 잘 나갔었습니다’가 어울리는 배우입니다. 문제는 ‘나갔었습니다’인 점. 과거형입니다. 그건 지금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사실 지금도 얼굴 보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싶은 느낌이 강하긴 합니다. 지나가다 그의 얼굴을 보면 10명 중 3~4명 정도는 고개를 갸우뚱한답니다. 여전히 그리고 지금도 당연하게 활동 하지만 예전만큼의 인지도 있는 배역은 하지 못한답니다. 그래도 그는 그것에 좌절하지 않고 또 개의치 않습니다. 그저 천성이 그런 듯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는 삶. 한 때 온전히 꼭대기까지 치고 올라가 봤기에 지금의 현재가 얼마나 소중 한지도 알고 있는 듯한 모습. 아역으로 출발했고, 이제는 중년이 됐지만 지금도 아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 그런데 그런 과거와 현재를 전혀 족쇄라 생각하지 않고 있단 그의 초연함. 멋지기도 하고 멋스럽기도 하고. 다양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좀 특이한 감정 하나가 있었습니다. ‘약간은 소름 끼친다고 할까’ 싶은. 아무래도 그가 출연한 영화 ‘좋.댓.구’를 본 뒤의 인터뷰이기에 그런 듯합니다. 이런 천연덕스러운 모습 뒤에 도대체 뭘 또 어떻게 뒤통수를 칠지 모를 의심이 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워낙 인상 좋은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능글맞게 대화를 이끌어 가지만 사실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배우 오태경과 ‘좋.댓.구’의 오태경. 그게 도저히 분리가 안됐습니다. 그 말에 눈 앞의 오태경이 박장대소를 터트립니다.
배우 오태경. 사진=키다리스튜디오
여전히 지금도 오태경을 ‘육남매’의 첫째로 생각하고, 그를 아역으로만 확신하는 분들이 많답니다. 아니 이제는 오태경이 아역이었단 사실보다 ‘오태경이 배우였나?’라 생각하는 게 더 많을 것 같다고 오태경 스스로가 너털 웃음입니다. 서운하고 또 아쉬울 법도 한데, 그럼에도 그는 어떤 무엇에서 한 단계 넘어선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좋.댓.구’란 영화의 주인공으로 제격이었는지 싶었습니다. 이 영화, 오태경이 주인공입니다. 오태경은 본인 그대로 이름까지 사용하고 등장합니다.
“절 모델로 기획했단 얘기를 들었을 때 당연히 안 믿었죠. 저는 감독님이 ‘사기꾼’인줄 알았어요. 아니 당연하잖아요(웃음). 날 모델로 기획 했다니. 하하하. 그리고 감독님과 전 일면식도 없었어요. 근데 나중에 들으니 아역 배우 출신 중년의 주인공이 필요했고. 그러다 절 생각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만나 뵈었을 때는 시나리오도 없었어요. 근데 나중에 몇 번 만난 뒤에는 제 작품을 다 찾아보시고 말투와 억양 등을 토대로 대사까지 완성된 시나리오를 주셨죠.”
배우 오태경. 사진=키다리스튜디오
이미 한 물간, 아니 오태경의 표현대로라면 몇 물은 간 자신에게 이런 호사가 있을까 싶었답니다. 믿기지 않아 사기꾼이라 여긴 감독님과의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 됐습니다. 일단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극중 ‘오태경’의 사연. 대부분은 진짜 입니다. 자신의 실제 사연이 투영되는 이런 경험도 꽤 생소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현실의 자신처럼 몇 물이 간 뒤 유튜버로 전향해 활동합니다. 그건 영화적 장치랍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걸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영화 구성이 일반 영화들과는 좀 다를 겁니다. 일단 카메라로 투영시킨 장면, 그건 다 실제에요. 제 사연들이니. 그리고 극중에서 유튜버로서 활동하는. 그러니깐 유튜브 카메라로 찍은 듯한 장면. 그건 다 가짜에요. 영화적 장치죠. 그래서 촬영 전 실제 유튜버들이 어떻게 하는지 평소에 거의 보지도 않던 유튜브 방송을 진짜 많이 봤어요. 그들의 말투와 몸짓 등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흡수 했어요. 그래서 촬영에 들어가선 의외로 수월 했어요.”
배우 오태경. 사진=키다리스튜디오
데뷔 이후 연기 경력만 따지면 벌써 35년차. 그에게 연기는 태어나서 가장 잘하고 또 가장 많이 해 본 일입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그는 배우 인생 최대 위기를 맞이한 적이 있었답니다. 촬영 하던 도중 이른바 ‘멘붕’이 와서 실제로 촬영을 일시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기까지 했었답니다. ‘연기’를 직업으로 택한 이후 처음 있었던 상황이었다며 당시를 떠올리는 과정에서도 혀를 내두르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기본적으로 극중 제 역할이 유튜버 잖아요. 화면만 보고 혼자 얘기를 하는 거에요. 근데 이것도 한 두 씬, 많으면 서너 씬 정도죠. 저희 영화 전체 러닝타임 중 90%가량을 제가 혼자 화면 보면서 떠들어요(웃음). 연기는 상대방과 주고 받는 분위기와 에너지를 통해 텐션도 유지가 되고 느낌도 살릴 수 있고 그런 건데, 이건 골방 같은 곳에서 저 혼자 떠들어야 해요. 그러니 나중에는 헷갈리다가 뭔가 ‘훅’하고 머리 속에서 터지더라고요. 실제로 그날 반나절 정도 촬영을 쉬었던 것 같아요. 혼자 하는 연기를 이렇게 많이 해본 작품은 앞으로도 없을 거에요.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배우 오태경. 사진=키다리스튜디오
‘좋.댓.구’는 깜짝 놀랄 반전을 품고 있지만 그 전까지는 오태경의 원맨쇼로만 이뤄집니다. 그래서 지겨울 법도 하고 리스크도 많지만 오히려 더 뛰어나고 흥미진진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이 영화 전체의 80~90%가량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가 있습니다. 남은 분량은 뜻밖의 인물들이 채워줍니다. 보기만 해도 깜짝 놀랄 만한 인물들입니다. 충무로 내로라하는 스타 감독들 스타 배우들이 카메오로 총출동합니다. 사실 카메오 보는 맛으로 만 봐도 이 영화, 무시 못할 재미가 넘쳐 납니다.
“제가 ‘올드보이’에서 최민식 선배님이 맡은 배역 아역을 했어요. 뭐 그런 인연이 작용해 박찬욱 감독님이 출연해 주셨는데. 제작사 쪽에서 미리 감독님에게 영화의 정보를 조금씩 흘렸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제가 전화를 드렸는데, ‘난 연기는 부담스럽다’고 거절 의사를 전하셔서, 제가 ‘연기 안 하셔도 된다. 감독님 그대로 나오신다’고 하니 ‘그럼 오케이’를 하셨죠. 하하하. 최민식 선배님은 안 나오시지만 최근 부천국제영화제에 가서 뵈었어요. 저희 영화 예고편 보셨다고. 저 보고 ‘오대수 연기를 하는데 가발 좀 좋은 거 쓰지’라고 농담도 하시고 유쾌했었습니다.”
배우 오태경. 사진=키다리스튜디오
7세에 우연히 길거리 캐스팅으로 광고를 찍으면서 시작한 배우 생활. 극중에서도 ‘아역 시절 이미지가 지금의 내 발목을 잡았다’고 눈물로 하소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질문에 오태경은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라고 웃었습니다. 영화 초반, 다시 말해 영화 전체를 찍는 카메라로 담은 장면은 진짜, 유튜버의 삶 이후 유튜브 방송 카메라로 담은 장면은 영화적 설정. 다시 말해 가짜. 그럼 ‘아역 배우의 삶이 발목을 잡았다’란 것은 가짜인 셈입니다.
배우 오태경. 사진=키다리스튜디오
“예전에 아버지가 ‘이제 해 볼만큼 해보지 않았냐’라고 하시면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길 권하신 적도 있어요. 근데 좀 억울하더라고요. 전 시작도 제대로 안했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아역 때보다 절 알아보시는 분도 거의 없어요. 그래서 아역 시절이 제 발목을 잡았냐고요? 그 시절이 있었으니 지금의 제가 있는 거죠. 전 단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적 없어요. 지금도 너무 연기가 재미있어요. 아직 주변에 소개해 드릴 만한 제 대표작이 없어요. 근데 ‘좋.댓.구’ 정도면 그게 가능할 듯 싶어요. 이런 대표작 하나 찍었으니. 이제부터 전 시작입니다. 배우 오태경, 이제 시작하니 기대해 주십시오(웃음).”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