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일단 제목이 별로입니다. 너무 길고, 또 너무 촌스럽습니다. 긴 제목에 부제까지 겹쳤습니다. 트집 잡자는 게 아닙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 그리고 재미에 자신이 있다면 정체성을 드러내는 제목의 강렬함은 상당히 정제된 단어로 압축 그리고 축약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목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해당 콘텐츠의 간판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천박사)이란 길고 긴 이 제목은 상업 영화 타이틀로서는 사실 ‘좋은 예’가 아닌 ‘나쁜 예’에 해당됩니다. 제목만 봐도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것을 예감하고 눈치채고 결국 스포일러 당하는 느낌입니다. 호기심과 궁금증 차원에서 장르 상업영화가 취해야 할 제목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설명과 명제가 구질구질해 졌습니다. ‘천박사’는 이런 모든 걸 ‘선입견’으로 끌어 내려 버립니다. 굳건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버티고 선 이 명제들을 끌어 내린 건 제작사 외유내강의 명확하고 또 영리한 프로듀싱 능력이 큰 부분을 차지한 듯 보입니다. 영화 전체에서 외유내강의 색채와 맛이 물씬 풍깁니다. 류승완 감독과 그의 아내 강혜정 프로듀서가 이끄는 외유내강은 명쾌하고 유쾌하며 가볍게 소비해서 소화시킬 장르 영화 구축에 확실한 정공법을 쥐고 있는듯합니다. 모두가 큰 성공을 점치지 못했던 ‘엑시트’를 무려 900만으로 이끌었습니다. ‘베테랑’의 1000만 돌파도 외유내강의 이런 정공법이 먹혀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의 정공법은 명확합니다. 장르의 특징과 작품의 특징이 교차하는 지점을 극대화 시키는 방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박사’는 약점투성이였지만 외유내강의 손을 타고 장점을 극단적으로 살려낸 ‘황금 팝콘무비’가 됐습니다.
‘천박사’는 앞서 ‘빙의’란 제목으로 제작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눈치 빠른 관객들은 동명의 웹툰을 떠올릴 만합니다. 김홍태·후렛샤 작가의 웹툰 ‘빙의’가 이 영화의 원작입니다. 하지만 연출을 맡은 김성식 감독과 외유내강 측은 몇 가지 포인트만 남겨두고 모든 부분을 해체해 재조립했습니다. ‘퇴마’ ‘오컬트’ 등 원작과 영화의 뼈대 줄거리와 캐릭터만 가져온 뒤 코미디와 판타지 그리고 어드벤처 장르를 뒤섞어 관람 타깃을 가족 단위로 확대 시켰습니다. 뚜렷한 색채의 장르 자체를 비슷한 재미를 느끼게 하는 유사 장르와 교배시킨 셈입니다.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틸. 사진=CJ ENM
기본 줄거리는 원작과 유사합니다. 진짜 박사가 아닌 그저 ‘천’씨 성을 가진 사기꾼, 통칭 ‘천박사’(강동원)로 불리는 주인공. 그는 사실 대대로 마을 성황당을 지키는 당주 무당집 장손. 그의 할아버지가 당주 무당입니다. 하지만 그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당주 무당이 되길 거부하고 집을 떠난 그는 인간 심리를 꿰뚫는 타고난 통찰력으로 ‘퇴마’를 가장한 사기 행각으로 돈을 버는 사기꾼이 됐습니다. 그의 곁에는 동업자이자 기술담당 인배(이동휘)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퇴마를 일종의 심리치료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사기를 정당화시키는 다소 귀여운 사기꾼들입니다. 그런 두 사람 앞에 어느 날 유경(이솜)이란 이름의 여성이 찾아옵니다. 유경은 인배가 운영하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들의 영적(?) 힘을 믿고 찾아왔습니다. 거액의 돈을 천박사 앞에서 쏟아낸 유경은 위험에 처한 여동생 유민(박소이)을 구해 달라 부탁합니다.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틸. 사진=CJ ENM
천박사와 인배는 유경과 여동생이 사는 마을에 도착합니다. 근데 이 마을 이상합니다. 그리고 유민을 보자 더 심각해 집니다. 단순하게 이들의 사기 행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나쁜 악령에 빙의가 된 듯합니다. 유민의 몸에 빙의가 된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천박사는 이때부터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와 기운을 뿜어냅니다. 유민에게 빙의 된 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닌 ‘반 귀신’으로 불리는 범천(허준호)의 영혼. 범천은 죽은 사람의 신체를 이용해 그들의 영혼을 조종하는 영력을 발휘합니다. 또한 자신의 영혼까지 끄집어 내 이곳저곳으로 빙의를 거듭할 수 있는 지독한 악귀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범천이 어린 유민을 노리고 빙의를 한 것.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언니 유경이 목표였습니다. 유경은 사실 귀신을 보는 신비한 눈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범천은 그 눈을 이용해 자신을 꽁꽁 묶어두고 있는 결계를 깨고 나가려 합니다. 그럼 그 결계를 친 인물은. 바로 천박사의 할아버지인 당주 무당이었습니다. 천박사는 범천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뒤 품 속에서 부러진 칠성검을 꺼내 듭니다. 바로 할아버지가 쓰던 칠성검입니다.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틸. 사진=CJ ENM
‘천박사’는 당초 ‘빙의’란 원제에서 제목 수정을 결정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 영화의 어두운 톤 앤 매너 때문일 듯합니다. 때문에 초반에는 수정된 제목의 분위기처럼 코미디와 패러디를 적절히 뒤섞은 시트콤 형식의 가벼움을 선보입니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천박사-인배 콤비가 사기를 치는 집 주인은 연출을 맡은 김성식 감독과 깊은 인연에서 출발합니다. 이 집의 공간과 분위기 그리고 등장 인물만 봐도 김 감독이 조감독으로 참여한 봉준호 감독의 걸작 ‘기생충’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엇보다 등장 인물 박명훈-이정은 두 배우는 ‘기생충’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도 부부로 출연해 코미디를 물씬 선사해 줍니다. 박명훈이 터트리는 ‘기생충’의 특급 유행어는 ‘대놓고 패러디’라고 외치고 있지만 결코 밉거나 싸구려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오히려 ‘천박사’의 초반 무게감을 덜어주는 필터링 역할로서 제격입니다.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틸. 사진=CJ ENM
귀신을 보는 유경의 등장 그리고 마을에 접어든 이후에는 급격하게 공포 스릴러 장르로 치환됩니다. 범천의 주술을 통해 빙의 돼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홍수는 좀비 장르의 인해전술을 떠올리듯 섬뜩합니다. 빙의와 빙의를 거듭하는 과정의 CG가 다소 미흡한 수준이지만 몰입감을 깨트리는 수준은 아닙니다.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틸. 사진=CJ ENM
중반 이후부터는 순수 오컬트 장르에 가깝습니다. 장르 마니아들에겐 호기심이 자극될 만한 요소들이 꽤 많이 등장합니다. 빙의 자체를 시각화 시킨 장면, 당주 무당에 대한 캐릭터 구축, 칠성검의 비주얼 무엇보다 이 영화의 부제이자 서사의 구조화 속 강력한 오브제 ‘설경’의 구체화가 그렇습니다. 영화 마지막 칠성검과 설경 그리고 범천과 천박사의 액션이 뒤엉키는 장면은 차고 넘칠 정도로 보는 재미를 만족시켜 줍니다.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틸. 사진=CJ ENM
강동원은 시대극이란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장르적 소재를 다룬 ‘전우치’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캐릭터적인 측면에서 ‘검사외전’ 속 자신의 모습과 비슷함을 지울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강동원은 이미 그 자체로 장르의 변주가 됐습니다. 그가 연기한 천박사는 ‘전우치’와 ‘검사외전’을 떠올리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반복된 캐릭터로 다가오진 않습니다. 강동원은 자신의 우월한 피지컬을 통해 동작 언어를 전달하는 방식까지 깨우친 듯합니다. ‘전우치’의 강동원이 천진난만 했고, ‘검사외전’의 강동원은 적당한 가벼움으로 포장돼 있었다면 이번 ‘천박사’의 강동원은 번뜩이는 칼날을 칼집 속에 숨긴 모양새처럼 다가옵니다. 강동원의 동작 언어가 전달하는 대사가 이 영화에서 더욱 명확하게 보이실 겁니다.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틸. 사진=CJ ENM
그의 반대편에 선 빌런 ‘범천’을 연기한 허준호는 그 자체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카리스마와 아우라 그리고 존재감을 선보입니다. 특유의 표정과 꾸부정한 자세로 칼을 추켜 세우고 달려오는 모습은 악몽 그 자체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틸. 사진=CJ ENM
제작사 외유내강은 상당한 내공의 충무로 영화 제작사입니다. ‘빙의’ 자체가 비주얼 언어로 불리는 영화로서의 치환이 분명 어려웠을 것이란 점을 간파했을 겁니다. 그래서 기본 골격과 뼈대만 남기고 작품 자체를 재창조하는 과정에 돌입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재창조를 통해 일궈낸 결과물이 전혀 다른 무엇이 아니란 점입니다. 원작 그리고 영화화 그리고 재창조. 이 세 가지 포인트를 모두 담아낸 최적의 결과물이란 점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틸. 사진=CJ ENM
놀이공원 청룡열차를 처음 탔을 때의 기분. 짜릿함과 자극 그리고 중독성. ‘천박사’의 3박자 입니다. 오는 27일 개봉.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틸. 사진=CJ ENM
P.S ‘블랙핑크’ 멤버 지수가 깜짝 등장합니다. 박정민이 지수와 호흡을 맞춥니다. 두 사람의 찰떡 궁합 연기. ‘천박사’의 또 다른 재미 포인트입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