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관통한 이념인 유교에서 지배층의 필독서는 ‘십삼경’입니다. 삼경(시경·서경·역경)과 삼례(주례·의례·예기), 삼전(춘추좌씨전·춘추곡량전·춘추공양전)의 9개에 논어와 맹자, 이아, 효경의 4개를 더해 ‘유교 십삼경’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필독서는 흔히 들어본 사서삼경입니다. 사서는 논어와 맹자, 대학, 중용입니다. 삼경은 시경, 서경(상서), 역경(주역)입니다.
사서삼경 중 시경은 주나라 시대의 노래를 담은 민요집입니다. 원래는 ‘시’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아는 경복궁도 시경 주아의 구절을 따서 정도전이 붙인 겁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
경복궁 뿐만이 아닙니다. 시경에는 시대를 꿰뚫는 여러 단어가 나옵니다. 요즘 시대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글귀도 있습니다.
바로 후안무치(厚顔無恥)입니다. 두꺼울 후, 얼굴 안, 없을 무, 부끄러울 치.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분명 사리에도 맞지 않고 말도 안되는 행동이나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오히려 뻔뻔한 모습을 보일 때 씁니다.
근거는 시경입니다. 기원전 2000년쯤. 중국 하나라 계왕에게는 아들이 많았습니다. 맏아들 태강은 정치는 돌보지 않고 사냥만 즐겼습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다 국경을 맞댄 적국 유궁국의 왕 후예에게 돌아갈 길이 끊기고 결국 비참하게 사망했습니다. 나머지 다섯 형제들은 나라를 망친 형을 원망하며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중 막내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교언여황 안지후이(巧言如簧 顔之厚矣). 피리소리처럼 교묘한 말을 하니 낯이 두껍고 부끄러워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낮이 두껍다’는 후안이 나옵니다. 후안은 공자의 말을 전한 논어 위정편의 '무치'와 만납니다.
후안무치 바이러스의 백신은 어디
공자는 '정치로 다스리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은 처벌에서 벗어나도 부끄러워 함이 없다. 덕으로 다스리고 예로 다스리면, 부끄러운 줄 알고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면이무치(免而無恥)가 나옵니다. ‘법을 어기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후대에 후안과 무치가 합쳐져 ‘후안무치’가 됩니다.
정치에 발담근 사람들의 후안무치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2000년 전에 후안이라고 읊고 탄식한 것을 보면요. 하지만 정치권의 후안무치가 거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바이러스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전염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2023년의 대한민국은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입니다. 학부모가 자기 자식이 문제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사에게 악을 쓰고, 길거리에서는 무차별 테러를 가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합니다.
양보하면 손해본다는 인식이 모두의 뇌리속에 박혀 꿈쩍도 안하는 세상이 된 지 오래입니다. 후안무치 바이러스의 백신은 어디 있을까요. 부끄러움의 회복.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 회복이 절실한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