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불과 몇 년 전, 그러니깐 정확하게는 ‘코로나19’ 이전이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코로나19’ 이전까지 충무로 상업 영화 시장에선 ‘이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어하는 영화와 ‘이 배우’가 출연을 결정한 영화. 딱 이렇게 구분이 됐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충무로에서 기획이 되는 영화 가운데 이 배우를 캐스팅 순위 제일 꼭대기에 올려 놓는 것. 그건 당연했습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내용이 불문이었습니다. 그건 다시 말하면 이 배우의 스펙트럼이 그 정도로 다양하고 또 넓은 영역을 ‘커버’하고도 남는 내공을 소유하고 있단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취향의 해석도 아니고 일반적인 흥행 보증 수표로서의 해석도 아닙니다. 이 배우가 등장하면 곧 장르가 됐고 서사가 완성됐으며 공감이 됐습니다. 이름 자체가 흥행 보증 수표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 오던 충무로 베테랑 배우들과는 사실 결 자체가 좀 다른 느낌의 배우였습니다. 뭔가 허술해 보이고 또 뭔가 비어 보이는 듯한 연기의 텐션. 그런데 그 맛이 묘할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 배우가 등장하면 ‘믿고 보는’이란 타이틀이 사실 무색했습니다. 그냥 당연히 보는, 그런 의미로 이 배우의 존재감을 설명해도 무리가 아닐 듯한 시대가 왔었습니다. 사실 요즘은 좀 주춤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옛말에 ‘썩어도 준치’란 말이 있듯이 이 배우의 존재감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그럼에도 ‘대체 불가’의 영역에서 충분히 소화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어느 누구도 감히 선뜻 나서기 힘든 실존인물이자 전설로 불리는 고 손기정 선생님을 맡을 용기를 내겠습니다. ‘1947 보스톤’에서 하정우는 그런 존재감을 가감 없이 보여줬습니다. 하정우는 여전히 ‘하정우’였습니다.
배우 하정우.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하정우가 ‘1947 보스톤’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전적으로 강제규 감독이었답니다. 개인적으로 강 감독은 하정우의 대학교 같은 과 선배이기도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은 같은 학창 시절을 보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배우를 꿈꾸던 새내기 하정우에게 강제규는 우러러 볼 수도 없는 존재였고, 또 반대로 꿈을 꾸게 하던 존재였습니다. 그런 강제규 감독이 자신에게 출연 제안을 했단 사실만으로도 그는 특별한 생각을 하고 또 감개무량함을 느끼며 시나리오를 읽고 출연 제안을 받아 들였답니다.
“감독님의 제안을 받고 ‘드디어 내가 출세했구나’라고 느낄 정도였어요(웃음). 진심으로 그런 느낌이었죠. 강제규 감독님이 어떤 존재입니까.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첫 출발인 ‘쉬리’를 만드시고, 1000만 흥행작 ‘태극기 휘날리며’를 연출하신 분이잖아요. ‘쉬리’는 제가 배우로 데뷔도 하기 전 군복무 당시 휴가를 나와서 봤던 영화에요. 예전에 사석에서 강 감독님을 뵌 적도 있어요. 한 식당에 갔는데 감독님이 연출부와 얼띤 토론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때 ‘나도 저 자리에 끼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는데, 이제는 제가 감독님 영화의 주연이에요. 정말 전 출세한거죠(웃음).”
배우 하정우.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자신이 꿈꾸고 우러러 보던 대선배이자 전설과도 같은 연출자의 러브콜을 받았으니 그 기분이 오죽할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뜻 출연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연기해야 할 배역입니다. 실존 인물이었습니다. 배우들에게 실존 인물 배역은 어떤 누구라도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하정우가 이번 영화에서 맡은 배역은 다름 아닌 ‘고 손기정 선생님’이었습니다.
“출연 결정은 했는데, 그때부턴 진짜 미치겠더라고요. ‘내가 손기정 선생님이라고’란 생각에. 이걸 해도 되는 건가. 내가 연기를 하는 게 맞나. 그런 생각만 들었어요. 더욱이 첫 장면이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일장기를 화분으로 가리는 그 장면 이잖아요. 우리가 역사 교과서에서 보던 그 장면 이에요. 진짜 마음이 너무 이상했고, 표현이 안될 정도로 무거웠어요. 그 장면에선 표정 하나부터 숨소리의 간격까지. 너무 어려웠어요. 제 연기 인생 통틀어서 그렇게 힘든 장면은 다신 없을 거에요. 지금 생각해도 숨이 막힐 정도이니.”
하정우는 ‘너무 감사하게도’란 표현을 썼습니다. 시사회를 통해 실제 손기정 선생님 가족분들이 보시고 ‘젊은 시절의 손기정과 너무 닮았다’란 감상평을 해줬다며 웃었습니다. 감격스러웠답니다. 배우로서 배역의 외적인 부분을 닮아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 것은 당연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내적인 부분을 외적인 부분과 비슷하게 맞춰 가려고 노력하는 건 오롯이 배우의 몫입니다. 하정우는 ‘묘하게 알 듯한 지점이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배우 하정우.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손기정 선생님이 이북 출신이시더라고요. 근데 제가 이북 출신들의 기질을 좀 알 것 같았어요. 저희 친가와 외가 모두 이북 출신이세요. 제 기억에 아버지도 그렇지만 특히 큰 아버지의 기질이 시나리오 속 손기정 선생님과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극중에 서윤복 선수를 다그치며 보스턴까지 끌고 가는 과정의 감정 표현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 외에 외적인 부분은 철저히 고증을 통해 맞춰 갔는데, 다행스럽게도 닮았다고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몰랐죠.”
‘역사’이자 ‘전설’로 존재하는 인물을 연기한 하정우의 부담은 사실 강제규 감독으로 인해 견딜 수 있었답니다. 학교 대선배이면서 영화계의 큰 어른과도 같은 존재인 강 감독과의 작업은 천하의 하정우라도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손기정’이란 상징적이면서도 실존했던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부담에 얼굴을 마주하기도 힘든 대선배와의 작업은 자칫 하정우란 베테랑 조차 움츠려 들게 만들 충분한 요인이었습니다.
배우 하정우.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다들 궁금해 하시는 부분이기도 해요. 강제규 감독님 어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근데 너무 유연하세요. 소통에 있어서 모든 걸 열어 두시고 받아 주세요. 유연하게 의견을 수렴하는 게 아니라 일단 너무도 편안하게 의문이 드는 지점에 대해선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저도 연출을 하고 있었기에 영화를 담아내는 기술과 시나리오를 쓰는 기술 등도 많은 부분 조언을 받았어요. 대중들이 감독님에게 거장이란 단어를 괜히 부여한 게 아니구나 싶었죠.”
그는 추석 연휴 직전 개봉하는 ‘1947 보스톤’과 함께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그리고 ‘거미집’까지. 한국영화 3파전의 시장 상황 속에서 모두가 승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최종 승자는 ‘1947 보스톤’이 됐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도 더했습니다. 촬영이 마무리된 뒤 만 4년 만에 개봉하는 이 영화가 보다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전했습니다.
배우 하정우.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마라톤이란 스포츠가 메인 소재이다 보니 언뜻 상상이 안될 거에요. 근데 보셔서 아시겠지만 예상과 달리 굉장한 속도감과 스릴감이 넘치는 스포츠로 구현이 돼 있어요. 특히나 특수관에서 보면 정말 그 재미와 경험이 남다를 것이라 확신합니다. 드라마적으로도 분명 경쟁력이 높다고 봅니다. 신파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태극기란 우리의 상징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존재인지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