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이름 그 자체로 충무로의 상징과도 같은 연출자였습니다. 1000만이란 흥행 숫자를 견인한 1세대 거장이자 국내에서 ‘블록버스터’란 상업 영화의 의미를 안착시킨 장본인. 강제규 감독을 설명하기 위해선 너무 많은 타이틀이 필요하고 또 반대로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그는 그 자체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더욱 놀라운 건 여전히 그의 행보가 현재 진행형이란 점입니다. 한가지 놀라운 점은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상업영화 연출 데뷔를 한 27년차 흥행 1세대 감독이면서 그의 연출 필모그래피가 겨우 여섯 작품에 불과하단 점입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연출 강제규’는 이번에 소개할 영화를 포함해 단 6편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그 면면은 화려하다 못해 ‘블록버스터’란 단어로도 담기 힘들 정도로 웅장함 그 자체입니다. 일단 국내 상업영화에 ‘블록버스터’의 시작으로 불리는 ‘쉬리’가 있습니다. 국내 2번째 1000만 흥행작 ‘태극기 휘날리며’도 그의 작품입니다. 한 남자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담아낸 ‘마이웨이’도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진한 감동을 담아냈던 ‘장수상회’는 강제규 감독의 인간적 스펙트럼을 보여줬던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1947 보스톤’은 어쩌면 그가 그리고자 하는 영화적 세계관의 집대성이라 할 또 다른 의미이자 존재가 될 듯합니다.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1947 보스톤’은 제목 그 자체가 이 영화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47년 미국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을 그립니다. 참고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1948년입니다. 1947년은 해방 이후 나라도 존재하지 않던 미군정 통치 상태의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은 고 손기정 남승룡 그리고 서윤복, 세 사람입니다. 낯익고 익숙한 이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라톤 영웅들. 그 분들이 맞습니다. 강제규 감독은 ‘마라톤’에 대한 얘기를 꼭 예전부터 하고 싶었답니다.
“예전부터 마라톤이란 스포츠를 제대로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전작인 ‘마이웨이’도 마라톤이 나오는데, 그 영화의 배경이 1940년대 입니다. 그 시절이나 ‘1947 보스톤’이나. 그 시대 젊은이들에게 마라톤은 희망 같은 존재였죠. 암울하고 암담한 그 시대에 손기정 선생님의 베를린 마라톤 금메달은 꿈을 줬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이 두 다리만 있으면 되는 마라톤, 그 시절 젊은이들이 도전하고 해볼만한 희망이었을 겁니다. 기록에서도 손기정을 꿈꾸던 젊은이들이 많았던 걸로 나오더라고요.”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1947 보스톤’은 사극도 아니고 현대극도 아닙니다.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시대극’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재현이 돼야 했습니다. 일단 사극이라면 돈을 투입해 세트를 제작하고 그에 따른 여러가지를 만들어 내면 됩니다. 하지만 1947년이란 시대는 현대와 근대의 중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선 배경이 국내가 아닙니다. 해외이다 보니 세트를 제작하고 그에 따른 고증을 바탕으로 그 시절을 재현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더욱이 보스톤 마라톤 코스를 그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실제 그 시절의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 보려고 했습니다. 현장을 답사했는데 당연히 80년 전의 그 모습은 존재하지도 않았죠. CG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코스를 두 세번 답사했는데 결국에는 포기를 하게 됐습니다. 더욱이 촬영 시기가 1월인 한 겨울이라 그것도 문제였죠. 결국 지구 전체를 거의 이 잡듯이 뒤졌는데 대상지로 떠오른 게 호주 멜버른 근교였습니다. 비슷한 코스로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싶었죠. 근데 그때 멜버른 근처에서 대형 산불이 났었어요. 하늘이 뿌옇게 변했죠. 여기도 안되나 싶었는데, 다행히 촬영 시기가 오면서 날씨가 맑아지더라고요. 촬영 기간 동안 하루 정도 비가 온 것 빼곤 정말 좋았습니다. 하늘이 도왔죠.”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1947 보스톤’은 사실 2020년 1월 모든 촬영이 끝났습니다. 2021년 설날 개봉이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코로나19’로 인해 개봉이 밀리고 또 밀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강 감독은 CG와 후반 작업에 더 공을 들이면서 완성도를 높여갔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터졌습니다. 극중 주인공에 가까운 배역인 ‘남승룡’을 연기한 배성우의 음주운전 문제가 터졌습니다. 편집으로도 처리가 불가능한 수준의 분량이 극중 남승룡의 존재감이었습니다. 강제규 감독은 고심했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사실 아찔합니다. 편집을 해야 하나. 근데 보셔서 아시겠지만 불가능한 수준이잖아요. 그럼 재촬영을 해야 하나. 그건 영화 개봉을 포기하자는 말과 같고. 고심을 했는데 편집을 최소화하는 방향에서 개봉을 하는 걸로 결정했죠. 얘기 자체의 원형을 건드릴 수는 없었어요. 얘기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고. 축소나 변형으로 그걸 훼손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 생각했죠. 돌아가신 선생님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봤고. 편집과 삭제를 최소화하는 지점으로 결정을 했었습니다.”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1947 보스톤’이 개봉하기 전 스포츠 전문가들, 그리고 스포츠 전문 기자들의 관심은 사실 대단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담아내는 실화의 배경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극적인 사건을 많이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도 그려져 있지만 정부 수립도 되기 전 대한민국에서 미국 보스톤으로 가는 여정 자체가 ‘말도 안되는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답니다. 이 얘기만 잘 살려내도 ‘1947 보스톤’의 극적인 부분은 그 어떤 상업 영화와도 비교가 안될 정도라는 말이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강제규 감독은 이 부분은 축소하고 마지막 하이라이트에서 경기 장면을 확대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입니다. 일단 초고는 다른 작가분이 쓰셨는데, 세 분이 보스톤까지 가는 과정이 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 같더라고요. 그 과정만 잘 살려도 이건 너무 재미있겠다 싶었죠. 제가 초고를 받고 자료 조사를 더 하면서 각색 작업을 하는데 너무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았어요. 그걸 좀 살려볼까 싶었는데, 그러면 세 선생님의 서사가 너무 줄어들더라고요. 재미를 위해 의미를 놓치게 되는 꼴이 날까 싶었죠. 실제로 재미있는 과정의 내용을 찍은 것도 있는데 편집에서 덜어냈습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죠.”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강제규 감독은 신파와 감동을 주는 연출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 연출자입니다. 그의 전작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1947 보스톤’에선 그런 부분이 최소화됐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지적을 받은 장면들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서윤복 선수(임시완)가 레이스 도중 갑자기 튀어 나온 세퍼드에게 걸려 넘어지는 장면 등입니다. 강 감독은 이 질문에 크게 웃으면서 해명 아닌 해명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장면은 실화랍니다.
“우선 그 장면은 실제로 있었던 장면입니다. 그럼에도 서윤복 선생님이 우승을 하신 것도 실화입니다. 촬영 당시에도 다들 그 장면에 대해선 부정적이었어요. 저도 그랬죠.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라고. 근데 진짜인데 어떻합니까(웃음). 실제로는 다리에 큰 상처를 입으셨는데 피를 흘리면서 다시 일어나 레이스를 펼친 끝에 우승을 하셨어요. 이걸 누가 믿겠습니까. 그나마 서윤복 선생님이 운동화의 끈이 풀려서 레이스에 큰 지장을 받으셨다고 하는데, 그건 너무 작위적 설정으로 보일 것 같아 그나마 뺀 겁니다. 근데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강제규 감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강제규 감독은 지난 몇 년 동안 이 작품 한 편에만 매달려 있었답니다. 이제 추석 연휴에 결국 선을 보이게 됐습니다. 연출작으로는 2015년 ‘장수상회’ 이후 무려 8년 만입니다.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지만 시절이 영화관 그리고 영화에겐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1세대 1000만 감독으로서 영화의 힘 그리고 관객의 선택과 그 선택의 힘을 믿는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개봉을 하게 됐습니다. 추석에 좋은 선물이 됐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즐거운 관람이 되고 힘이 나고 또 용기가 되는 그런 선택이 됐으면 합니다. ‘1947 보스톤’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가 담긴 내용입니다. 좌절과 실패 그리고 패배의 역사가 아닌 위대한 승리의 역사입니다. 그 승리의 역사를 보시는 재미와 쾌감이 있으실 겁니다. ‘1947 보스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추석이 되시길 바랍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