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2018년 5월 국내 개봉한 이창동 감독 연출 ‘버닝’을 통해 데뷔한 전종서. ‘버닝’ 이전까지 그 어떤 필모그래피도 없었던 이 배우.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이 배우의 날 것 같은 연기는 ‘버닝’의 모호함과 맞물리며 그 자체로 ‘버닝’을 만들어 냈습니다. 연기로는 ‘신인’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살아 숨쉬는 펄떡거림을 고스란히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은 불안감. 그건 오롯이 전종서의 몫이었습니다. 당시 해외 행사를 위해 공항 출국 직전 언론의 카메라 세례에 극도의 불안한 감정을 드러냈던 모습. 두고두고 회자됐던 상황. 하지만 이후 그와 만난 뒤 그 상황은 이해가 됐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내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전종서에게 연기는 즐거움이자 꼭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세상의 관심은 자신의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던 자극이었습니다. 그런 전종서도 그래서였는지 그 둘의 관계를 끊어 낼 수는 없단 걸 인정하고 빠르게 스스로가 바꿔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스스로가 바꿔지니 연기의 펄떡거림 그 자체는 더욱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전종서가 등장하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되고 빠르게 녹아 들어갔습니다. ‘버닝’ 이후 전종서의 필모그래피도 빠르게 변화해 나갔습니다. 데뷔작 ‘버닝’의 강렬함과 어려움이 너무 깊게 새겨져 버린 탓일까. 전종서는 보다 더 쉽고 보다 더 친숙한 대중성에 방점을 찍고 대중과의 접점을 찾으러 스스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점 하나. 전종서가 스스로의 변화에 눈을 떠 버렸단 것. 이건 전종서에게 한계는 없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그는 이제 ‘연기 잘하는 배우’에서 ‘연기 괴물’로 발돋움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발레리나’의 ‘옥주’를 보면 그의 변화가 너무도 눈에 ‘확’ 들어올 것입니다.
배우 전종서. 사진=앤드마크
일단 전종서, 어려운 배우란 인식이 강했습니다. 배우, 다시 말해 인간 자체의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기자들에게 인터뷰가 꽤 힘든 배우 중 한 명으로 항상 꼽히던 리스트에 그의 이름은 데뷔 이후 계속 존재해 왔습니다. 무엇보다 앞서 계속 언급한 ‘버닝’의 강렬함이 너무 뚜렷했습니다. 쉽지 않은 어려운 영화 속에서 쉽지 않은 배역을 쉽게 접근할 수 없게 연기해 버린 그의 배역 해석력. 그래서 ‘전종서는 어려운 영화를 좋아하는 배우’란 인식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시는 시선 다 알고 있어요. 근데 저 진짜 어려운 영화 별로 안 좋아해요(웃음). 저도 마블 영화 되게 좋아해요 하하하. 사실 데뷔 초에는 연기로만 대중들과 소통하려 했어요. 성격도 굉장히 내성적이라 그게 맞겠다 싶었죠. 정말 친한 사람 몇 명과만 깊게 소통하지 대중과의 넓은 스킨십은 제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근데 제가 변화를 해야 한단 것도 이해가 됐고, 저도 좀 먼저 다가서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그 변화의 시간이 좀 길었던 것뿐이에요. 이젠 적극적으로 소통할 생각이에요(웃음).”
'발레리나' 스틸. 사진=넷플릭스
그런 전종서에게 ‘발레리나’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맞춤형 작품이었을 듯합니다. 그의 데뷔작 ‘버닝’이 이른바 예술적인 관점에 가장 특화된 아트 무비였다면 ‘발레리나’는 대중성에 온전히 치우친 화끈한 킬링 타임용 무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친구 민희(박유림)의 죽음에 얽힌 인물들에게 가장 냉혹하고 처절한 방식으로 복수를 가하는 전직 경호원 출신의 옥주를 연기한 전종서입니다.
“제목이 ‘발레리나’라고 해서 ‘이번엔 발레를 배워야 하나’ 싶었죠. 그리고 읽어보니 민희가 주인공처럼 다가와서 전 민희에 맞춰서 읽고 있었는데 옥주가 복수를 하는 얘기였고. 근데 저보고 옥주를 해 달라고 하셔서 좀 놀랐었죠(웃음). 이 작품 전까지는 제가 많이 드러나고 또 앞에서 끌고 가는 역으로 나왔었다면 이번에는 제가 뒤에서 모든 걸 뒷받침하고 밀고 가는 역을 자처했어요. 후반부에 등장하는 여고생(신세휘)도 제가 지켜야 하는 인물 중 한 명이거든요. 그 둘의 호흡도 가져가야 했기에 뒤에서 모두가 지치지 않게 받쳐가는 것에 집중했죠.”
'발레리나' 스틸. 사진=넷플릭스
‘발레리나’를 보면 옥주의 절친 민희에게 큰 일이 닥치고, 옥주가 복수를 하는 과정. 딱 이 정도의 서사로 압축이 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이 자체의 얘기가 주는 카타르시스도 상당히 강렬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바로 옥주의 서사입니다. 영화에선 자세한 언급은 나오지 않지만 옥주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서사가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궁금증을 콕 짚어 자극할 정도입니다.
“어떤 분은 옥주의 얘기로만 만들어진 프리퀄을 보고 싶다는 분도 계시던데(웃음). 우선 원래 시나리오에는 옥주와 민희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 좀 더 자세히 나왔지만 수정 과정에서 그저 몇 장면의 회상으로 처리가 됐어요. 그 둘을 퀴어로 해석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아니에요. 여성 사이에 끈끈한 친구. 그 정도로 봐주시면 될 듯해요. 그리고 옥주의 서사도 꽤 많았어요. 전직 청부업자인데, 많은 부분이 수정되면서 압축돼서 좀 아쉽기는 해요. 하지만 지금의 결과물이 임팩트가 있어서 마음에 들어요.”
배우 전종서. 사진=앤드마크
‘발레리나’의 메인 플롯, 마약과 성범죄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재했고 또 가장 악명을 떨쳤던 몇몇 사건이 겹쳐질 정도로 극중 드러나는 사건의 충격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런 점을 영화적으로 표현할 때 시각화 시킨다면 자극적인 면에서 연출자의 외면을 받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발레리나’는 상당히 독특한 하지만 실제 시각화보다 더 끔찍한 방식으로 피해자들의 아픔을 담아 버렸습니다. 한 명 한 명의 피해자를 실체화 시키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스크린에 투영시켰습니다.
“연출을 맡으신 이충현 감독님이 여성 서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에요. 뭔가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는 것보다 더 강렬하 하지만 피해자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방식을 택하시는 게 너무 공감이 됐어요. 피해자들의 피해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도 있지만 그걸 거부하고 그들의 피해 과정이 담긴 수많은 USB를 통해 관객들의 분노를 이입하게 만드시잖아요. 여성 캐릭터와 여성 서사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세요. 전 다른 여배우분들도 이충현 감독님과 꼭 한 번 작업하시는 걸 추천드려요.”
'발레리나' 스틸. 사진=넷플릭스
워낙 어렵고 또 철학적 작품으로 유명했던 ‘버닝’. 그 작품 속에서 가장 상징적 인물로 상업 영화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전종서. 그는 첫 데뷔작 이후 필모그래피를 더하면서 점점 더 대중과의 접점을 줄여 나가는 작품 선택을 보여왔습니다. 주제적 측면에서 분명 다소 어둡고 무거울 지언정 전종서의 선택은 대중이 그를 바라보는 선입견을 줄여 나가는 쪽으로 분명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발레리나’도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작품입니다.
배우 전종서. 사진=앤드마크
“제가 아무래도 ‘버닝’으로 데뷔를 하고 계속 장르적 색채가 강한 작품을 몇 개 더 하면서 소위 난이도가 있는 작품을 선호하는 배우로 알려졌는데. 근데 실제로는 전혀 안그래요(웃음). 마블 영화 엄청 좋아하거든요 하하하. 전체 관람가 영화도 아주 좋아해요. 제게도 심오하거나 어려운 내용은 저도 별로에요. 그래서 로맨스를 상당히 좋아하고, 요즘도 ‘로코’를 찍는데 딱 제 취향대로 작품 선택이 가는 것 같아요. 이전까진 제가 좀 자극적이고 배우로서 도전해 볼만한 작품을 많이 선택했다면 이제는 저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많이 선호하게 되는 것 같아요. ‘발레리나’도 그렇게 보이지 않으세요?(웃음)”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