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창현 기자]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 공청회가 열렸던 지난 1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다른 부처 기관장들은 참석하지 않은 채 유가족과 생존자 10명, 그리고 이태원 지역 상인 1명이 진술인으로 나왔습니다.
다른 상인들이 나서기 힘들어했던 이 자리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남인석씨(81)는 “이태원 상인으로 제가 나올 자리가 아닌 거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유가족들에게 먼저 사과해야 할 것 같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시 남씨가 절을 하며 사과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참사를 겪은 이태원 상인들 역시 피해자였기 때문입니다.
서울 용산구 해밀턴호텔 야외전광판에 ‘10.29 핼러윈 참사의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라는 문구가 표시돼 있다. (사진=안창현 기자)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354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 발생 1년. 그동안 많은 시민이 해밀턴호텔 옆 골목의 참사현장을 찾았습니다.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2만개 넘는 조화가 쌓였고 수십만장의 추모 포스트잇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가족들은 정부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이태원 상인들은 삶의 터전에서 참사 후유증을 견디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태원 상인들 참사 여파
“심리상담 받기도” “당장 월세 걱정”
이태원역 인근 편의점주 정모씨(53)는 “편의점에 혼자 있다 보면 아직도 그날 생각이 나서 힘들 때가 있다. 보건소에서 심리 상담을 받기도 했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며 “당시 아르바이트생들은 모두 그만뒀다. 참사 현장을 직접 목격한 주변 상인들 모두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해밀톤호텔 건너편 대로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이모씨(48)는 “이태원 참사 관련해서 뉴스들을 접하면서 당시 기억이 쉽게 떠나지 않았다. 최근 핼러윈데이가 다가오면서 더 그런 것 같다”며 “막연히 ‘좋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참사 충격도 충격이지만, 당장 월세에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라고 덧붙였습니다.
참사가 일어난 해밀턴호텔 골목 세계음식특화거리에는 곳곳에 임대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텅 빈 가게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창에 ‘임대’ 문구를 내건 안내판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인근에서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61)는 “참사 이후에 재계약을 하지 않고 나간 가게들이 적지 않다”며 “최근 경기가 안 좋고 새로 입점하겠다는 문의도 없어 공실만 쌓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태원역 1번 출구 옆 참사가 발생한 골목길 모습. (사진=안창현 기자)
“핼러윈 행사 최대한 자제”
핼러윈데이를 맞는 이태원 상인들의 마음도 복잡했습니다. 또다시 안전사고라도 생기면 그 후폭풍은 감당하기 힘들 것이란 생각에서입니다. 예년과 같으면 이맘때 이태원 일대는 핼러윈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매장을 꾸미고 각종 이벤트를 진행했지만, 올해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태원로에서 5년째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최모씨(50)는 “지난해에는 핼러윈 장식을 하고 메뉴도 핼러윈에 맞춰 준비했다. 하지만 올해는 평소와 다름없이 장사할 예정”이라며 “주변 상인들도 핼러윈 행사를 최대한 자제하자는 분위기다. 별다른 사고 없이 조용하게 지나갈 수 있기만 바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사 이후 급감했던 매출이 좀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근처에서 의류점을 하는 박모씨(54)는 “핼러윈데이는 일년 중 매출이 가장 좋았던 대목”이라며 “혹시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그동안 장사가 너무 안돼 이번 핼러윈 때 좀 만회하는 기대도 한다”고 털어놨습니다.
이태원역 인근 상가 골목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안창현 기자)
다행히 이태원 일대 상권은 조금씩 살아나고 있습니다.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인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서비스’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 이태원 상권의 일평균 유동 인구수는 1만6173명으로, 지난해 2분기 대비 75% 수준까지 회복됐습니다. 올해 1분기 일평균 유동 인구수인 1만1260명보다는 43.6% 늘었습니다. 참사 직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침체됐던 지역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과 함께 시민들이 다시 이태원을 찾으며 예전의 활력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습니다.
“참사 뒷수습 중요…갈등 조속히 해결해야”
지난 26일에는 참사가 발생한 좁은 골목길이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됐습니다. 이 장소가 참사 현장에 머물지 않고 기억과 안전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유가족들과 지역 주민, 상인들이 논의를 모은 결과입니다.
이태원역 1번 출구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은 길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목, 참사의 의미를 담아 바닥에 새겨진 문구과 3개의 빌보드(표지판), 사진작가 황예지의 작품, 시민들이 남긴 추모의 포스트잇 등으로 조성됐습니다. 빌보드의 사진 작품과 시민들의 포스트잇은 2달에 한번씩 교체될 예정입니다.
이태원 인근 상인들은 지난 1년간 참사의 상처를 씻기 위해 여러 노력들을 해왔습니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캠페인에 동참하고,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한 각종 행사들을 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참사 당일 구조활동에 적극 나섰던 상인들은 아직도 참사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얘기합니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이태원역 1번 출구 참사 현장에 조성된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의 조형물. (사진=안창현 기자)
공인중개사 김씨는 “지역 주민과 상인들 모두 참사 여파로 정신적, 경제적인 타격을 컸다. 여기 권리금이 보통 2억원이 넘었는데, 지금은 한 푼도 못 받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며 “지역 상품권을 발행하는 단발성 정책 말고 정부에서 자영업자들을 위한 현실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편의점주 정씨는 “참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봐서 그런지 마음이 더 무겁다”며 “상처가 치유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만큼 뒷수습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1년 동안 참사를 놓고 사회적 갈등만 커지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모두 노력해야 한다”며 “그래야 이곳 상인들도 그렇고, 이태원을 찾는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