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연구를 하기 위해 열심히 계획을 짰고, 갖가지 서류를 마련해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정부 보조금으로 새 연구인력도 충원해 장기적인 계획으로 미래 먹거리를 위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정부 지원금이 반토막이 났습니다.
지난 19일 부산 강서구 송정동 부산지방중소벤처기업청에서 '2024년 R&D 사업비 감액기업 대상 설명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정부의 R&D 예산 삭감으로 올해 중기부 R&D 사업 47개 중 24개가 삭감됩니다. 이 중 22개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들은 사업비가 절반으로 깎입니다.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셈입니다. 예산 절반이 날아가면 당장 인건비도 감당하지 못해 연구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 연구비 삭감 대상이 된 기업들이 지난 19일 부산 강서구 송정동 부산지방중소벤처기업청에 모였습니다. 이날 열린 '2024년 R&D 사업비 감액기업 대상 설명회'의 예상 참여규모는 50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설명회 시작 전부터 주차장은 만차가 됐고 예상보다 100명은 족히 넘는 인원이 참석해 한 층에서 진행하려고 했던 설명회는 3개 층에서 진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기부 기술혁신정책관도 세 층을 오가며 설명회에 참석한 기업들의 질의를 경청했습니다.
불만과 짜증, 항의가 가득할 줄 알았지만 이들 기업들은 상당히 초연했습니다. 차분하게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설명회 시작 1시간 전쯤에 이미 이곳에 도착한 한 기업 연구원은 설명회가 끝나자마자 자신들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챙기고는 바로 이곳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불만보다는 대책 세우는 게 먼저인 듯 했습니다.
설명회 이후 이어지는 질의시간에 기업들은 저마다 연구사업의 종료시기를 얘기한 뒤 연구기간을 유예하는 방법, 인건비 등 각종 비용의 비중, 구매조건부 사업의 경우 의무조항의 변화 등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연구 시작시기에 따라 회계연도가 달라져 지원금 지급 시기에 대한 질의도 많았습니다. 기정원 측은 혼선 방지를 위해 재차 헛갈리는 항목들을 강조해 설명했습니다.
몇몇 기업들을 대상으로 지원금 삭감에 대한 심정을 물었습니다. 타격이 크다는 기업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별을 5단계로 나눠 설명합니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순입니다. 처음에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부정하다가 이런 상황에 처해진 것에 대해 분노를 하다가 점차 타협으로 변화합니다. 이날 설명회를 찾은 기업들은 분노에서 타협으로 넘어가고 있는 과정이었습니다. 여러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곧 우울도 찾아오겠지요.
한 기업은 지원금이 줄어도 자사 비용을 총 동원해 연구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며 이에 대한 베네핏은 없냐고 묻기도 했지만 기정원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예산이 삭감돼 난리통인 마당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제 한동안 기정원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전망입니다. 대상기업에게 일일이 지원금과의 이별을 통보하고, 새로운 협약을 받아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