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영화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개봉작을 볼 수 있는 멀티플렉스는 곳곳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가 아닌 영화관은 하나둘 자취를 감춰 전국적으로 소멸 직전에 이른 상태입니다. 영화관 소멸, 단순히 ‘추억 속 극장이 사라졌다’로 치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산업화에 매몰된 한국영화계의 현주소와 그로 인한 각종 폐단이 ‘영화관 소멸’이라는 하나의 현상 안에 응축돼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영화계가 보내는 위기 신호, 영화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극장의 경쟁 상대는 다른 극장이 아닌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가 됐습니다. OTT에 점령당한 국내 영화 시장 생태계는 무너진 상태입니다. 극장을 대체하게 된 OTT의 성장은 단순히 플랫폼 차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콘텐츠의 획일화, 철저한 자본 중심 콘텐츠 제작 등 수많은 부작용을 낳으며 찬란했던 K무비의 자멸을 빠르게 이끌고 있습니다.
장르물 중심의 획일화 된 콘텐츠
독립영화계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전하는 얘기입니다. 해외 영화제 출품 통로가 사실상 다 막혔단 것. 이유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작품성 위주 해외 영화제마저 ‘한국영화=장르물’ 공식이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랍니다.
한 관계자는 “이제 해외 영화제에선 장르물이 아니면 한국 영화엔 관심을 갖지 않는다”며 “한국이 장르물을 잘 만드는 나라란 인식을 갖게 된 건 좋지만, 장르물만 잘 만드는 나라로 인식되는 건 전혀 다른 얘기”라 말했습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수요가 장르물에만 있으니 감독들도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전공(강점)을 버리고 그쪽으로 몰린다”며 “한국 영화의 힘은 다양성과 창의성에 있었는데 지금 영화 시장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앞으로가 큰일이라며 혀를 찬다”고 전했습니다.
‘한국영화=장르물’이란 공식. 이 공식을 하나의 사실처럼 굳건하게 만들어 버린 건 OTT입니다.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자극적이고 수위 높은 폭력과 노출로 화제를 모았던 넷플릭스 시리즈와 영화.
영화는 문화가 아니다…'영화=매출' 공식 전환
OTT 시청 수요는 늘고 있지만 OTT엔 국내 방송에서와 같은 ‘상영 제한’ 규제가 없습니다. 더 자극적이고, 더 화려하며, 더 잔인하거나 더 선정적일수록 시청률은 올라갑니다. OTT 콘텐츠는 OTT 콘텐츠대로 성장하고, 국내 영화 시장은 영화 시장대로 성장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국내 영화 시장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마치 OTT와도 같은 철저한 상업 논리에 치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한 중견 제작자는 “최근 영화를 보면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는가. 맞춤형 대규모 생산 방식으로 자본 권력이 제작 현장을 점령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며 “대기업 계열 투자 배급사들이 영화 시장에 진입하면서 ‘투자금 회수’ 개념이 도입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영화는 기획과 개발 단계에서부터 ‘흥행 실패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흥행 코드와 대중 트렌드가 기획 개발 단계부터 고려 되면서 ‘영화=문화’가 아니라 ‘영화=매출’이라는 공식으로 전환됐습니다.
당연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지적은 ‘문화’ 산업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문화가 처음부터 벌어들일 ‘돈’을 염두하기 시작하면 문화는 문화로서의 가치 및 다양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한국 영화 중흥기로 불리던 1990년대는 자본이 아닌 사람 중심 시장 생태계였습니다. 기획과 개발을 담당하는 프로듀서의 결정에 따라 영화 제작이 이뤄지는 구조였는데, 이를 ‘맨 파워’ 시대라 부릅니다. 자본 권력에서 독립된 창의력이 시장을 주도하면서 다양한 장르 속 완성도 높은 작품이 쏟아졌고, 이를 기반으로 지금의 K무비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작년부터 극장가 1000만 흥행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범죄도시' 시리즈들. 하지만 획일화된 구성과 내용 등으로 흥행 여부와는 상관없이 평단의 호평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돌파구 못 찾으면 남은 건 자멸뿐
한국 영화 시장은 대기업 중심 투자 배급사가 기획과 투자 배급에 이어 상영까지 독점하는 구조입니다
. 이른바 수직계열화
, 이는
1998년 국내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
(CJ CGV(079160))이 들어서면서 시작됐습니다
.
처음엔 대기업이 영화 시장에 들어오니 자본 경쟁력에 따른 이점이 돋보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곧 자본 중심 수직계열화 한계가 드러납니다. ‘코로나19’로 극장(상영)이 영업 제한에 걸리면서 영화 유통(배급)에 빨간불이 켜지자 철저한 경제 논리를 추구하는 대기업 자본이 투자를 줄여버린 겁니다. 이는 영화의 기획 개발 중단으로 이어졌고 영화 시장은 급격히 위축됐습니다. 설상가상 멀티플렉스가 영화관람료를 인상하면서 극장은 더 외면받게 됐고, 이 틈을 OTT가 파고들며 국내 안착에 성공했습니다.
OTT(넷플릭스)는 15% 가량의 리쿱율(투자금+일정금액 수익률)을 제시하며 극장 개봉이 막힌 콘텐츠를 싹쓸이했고, OTT에선 안정적 수익이 보장된단 인식이 확산하면서 K콘텐츠도 OTT 입맛에 맞는 장르물 중심으로 획일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영화 제작사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대기업이 지배하는 기획+투자+제작+배급+상영 시스템이 한국 영화 시장 무덤이 된 셈”이라며 “앞으로는 검증된 인기 프랜차이즈나 할리우드 대작만이 넘쳐날 것이다.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남은 건 한국 영화의 자멸뿐”이라 자조했습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