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근윤 기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칼날이 결국 대통령실까지 겨냥할 걸로 보입니다. 최근 공수처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으로부터 대통령 격노를 들었다'는 해병대 고위 간부의 진술과 관련된 녹취파일을 확보한 겁니다.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주장한 '대통령 격노설'은 사실이었고, 윗선의 수사외압 의혹도 있었을 개연성이 더 커진 겁니다. 법조계는 VIP 격노가 수사에 어디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외압 라인과 외압의 구체적 내용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라도 공수처 시선이 윗선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입니다.
지난 23일 공수처는 김 사령관의 휴대전화를 포렌식해 사용 내역을 복구하던 중 한 해병대 고위 간부와 VIP 격노설을 전제로 통화를 한 녹취파일을 발견했습니다. 김 사령관이 통화를 한 해병대 고위 간부는 앞서 공수처 조사에서 '나도 김 사령관으로부터 VIP 격노설 들었다'고 진술한 그 고위 간부이기도 합니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지난 21일 오전 경기 정부과천청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처럼 공수처가 VIP 격노설에 관한 복수의 진술과 함께 물증을 확보하게 되자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 관한 수사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관측됩니다. 추가 조사를 통해 VIP 격노설의 윤곽이 잡히면, 공수처의 수사 범위가 김 사령관에게 외압을 행사할 수 있는 라인까지 수사가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과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 등입니다.
공수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공수처 출신의 한 변호사는 "새로 온 오동운 공수처장도 채 상병 사건이 최우선 과제라고 못을 박았고, 해당 사건을 조사하는 분들은 좌고우면 하지 않고 원칙적으로 수사하는 분들로 알고 있다"며 "그런 성향으로 봤을 때 의혹이 나온다고 하면 윗선으로 수사는 당연한 수순"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공수처의 한정된 인력 한계로 제한된 부분만 깊게 들여다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고 부연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외압을 한 혐의를 받는 이 전 장관 측은 일부 언론보도에 반박하는 자료를 내며 대응에 나섰습니다. 이 전 장관 측은 24일 "억지 프레임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대통령이 차분하게 지시했으면 아무런 죄가 되지 않고, 격한 목소리로 말하면 그것이 죄가 되느냐는 겁니다. VIP 격노설 자체가 범죄성립 요건이 안 되는 말할 것도 없고, 애초 그런 사실 자체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 전 장관의 변호를 맡은 김재훈 변호사는 공수처에 제출한 3차 의견서에서 "일각에서 지난해 7월31일 격노한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에게 사단장을 빼라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나, 피고발인은 대통령을 포함한 그 누구로부터도 그러한 말을 들은 사실이 없다"며 "나아가 피고발인은 그 누구에게도 그러한 지시를 한 사실이 없다. 이것이 실체적 진실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해병대 수사단이 조사한 내용은 하나도 빠짐없이 경북경찰청에 전달됐고, 국방부는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을 수사 대상에서 제외시킨 사실도 없다"고 했습니다. 기록 중 은폐된 것이 없다는 말로,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을 촉구한 겁니다.
법조계에서는 공수처가 VIP 격노설이 담긴 통화 녹취파일 등을 확보해 의혹의 실마리를 잡았다면 칼날이 윗선으로 향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고 전망했습니다. '누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의혹에 대한 확인 차원에서라도 수사에 착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한 포렌식 전문 변호사는 "예전에 박근혜 대통령 비서관이었던 정호성 청와대 부속 비서관도 최순실씨와 통화 녹음을 했다가 나중에 핸드폰이 압수됐다"면서 "포렌식 과정을 통해 국정농단 실태가 낱낱이 밝혀진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포렌식 과정을 통해 녹음파일이 복원될 경우 해당 내용에 따라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일 수도, 오히려 대변하는 내용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공수처 출신의 한 변호사는 "조사의 전제는 처벌이 아니라 윗선 수사로 갈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사실만을 확인하려고 거슬러 타고 올라가 조사하는 것도 그 자체로 갖는 중압감이 있다. 수사의 무게를 알고 자제는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정치권에서 채 상병 특검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엔 "특검은 정치적 영역과 다소 겹쳐있기 때문에 (특검으로 가는 건) 공수처 내 수사 진행 여부와 상관은 없다"며 "과거 사례를 비춰봤을 때 특검을 주장하는 측에서 만족할 만한 사람이 구속이 되면 특검까지 안 가고 마무리되는 케이스가 있었다"고 부연했습니다.
유근윤 기자 9nyo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