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책금융기관들의 설립 근거법과 이사회 구성 등을 들여다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투명성, 신뢰성, 공정성 등에서 가장 선도적이어야 할 정책금융기관이 여전히 낡은 지배구조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정책금융기관 수장들의 이사회 의장 겸직'이 문제였습니다. 중소·벤처기업 금융 지원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은행부터 무역금융을 담당하는 한국수출입은행, 주택금융을 담당하는 한국주택금융공사 등 대부분 정책금융기관 기관장이 이사회 의장까지 함께 맡고 있었습니다.
한국무역보험공사의 경우 사장이 운영위원회와 이사회 의사결정에 따라야 하지만, 대외관계나 내부에서나 공사 업무 총괄은 물론 운영위원회와 이사회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주도적 위치였습니다. 무역보험법 시행령 제15조에 따라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겸하면서 회의 소집권도 가졌습니다. 또 정관 제15조와 16조에 의해 이사회 의장까지 담당하며 이사회 회의 소집권·주재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정책금융기관 수장들에 움직이는 이사회가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가령 이사회에서 상임이사 외 비상임이사를 두는 이유는 기관장과 상임이사들에 대한 견제, 감독이 목적인데 기관장이 비상임이사 인사권을 쥐고 있을 경우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동료의식 등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비상임이사의 이사회 활동이 형식적 수준에서 그치는 게 비일비재합니다. 일례로 지난해 19차례 개최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이사회는 전체 77개 안건 중 단순 보고 13개를 제외하고 64개 안건을 전부 원안 그대로 통과시켰습니다. 64개 안건 가운데 반대 의견이 나온 것은 '전세 보증금 반환 보증 규정 일부 개정 규정안'이 유일했는데, 이마저도 김재승 비상임이사만 홀로 반대 의견을 냈을 뿐 안건 자체는 원안에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안건을 일사천리로 처리해 놓고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발표한 '2023년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 결과'에선 미흡(D) 등급을 받았습니다.
정책금융기관 수장들이 이사회를 장악하는 행태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이사회에 비상임이사를 과반수 두더라도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회사 법학에선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 분리를 요구하고 있고, 삼성전자나 SK, 포스코홀딩스 등 민간기업에선 이미 변화가 이뤄졌습니다. 흔히 알려진 'ESG(친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일환입니다. 은행연합회 역시 14년 전인 2010년 은행 CEO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지 않고 사외이사가 의장을 맡도록 권장하는 '은행권 사외이사 제도 모범규준'을 의결·발표했습니다.
정책 수행을 위해 정부가 세운 '정책금융기관'이 케케묵은 지배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민간에 어떤 ESG 경영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입법부인 국회와 사법부인 법원을 다 통제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견제와 감독을 수행할 이들은 입 닫으며 대통령에게 줄 서는 구시대적 정치만 남을 겁니다.
정책금융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철학자인 게오르크 헤겔이 주창한 대로 변증법적 발전은 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모순적 한계 때문에 다시 정이 되며 이에 대립되는 새로운 명제 '반'을 만나 합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부디 이사회 독립성을 지켜주길 바랍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지배구조 정책 세미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