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창작극의 흐름과는 별개로, 최근 들어 해외 명작 소설이나 희곡을 국내 상황에 맞게 번안해 극으로 올리는 사례가 빈번하다. 희곡의 역사가 오래지 않은 이 땅에서 연극인들은 여전히 관객과 소통할 만한 '이야기' 찾기에 굶주려 있다. 명작이라는 조건 만으로는 관객과 소통하기 힘들다. 완성도가 있으면서도 '우리 이야기'로 여겨져야 한다.
다행히도 지명이나 인명 정도만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변환하던 시대가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그 동안 관객이 엉터리 번역극을 꾸준히 외면해온 덕분이자, 창작극을 통해 이미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들이 명작의 무대화에 꾸준히 관심을 가진 덕분이다.
배삼식 작가의 경우가 명작의 무대화를 성공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명작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들로는 <열하일기만보>, <은세계>, <거트루드> 등이 있다. 특히 대표작 중 하나인 <열하일기만보>는 유랑에 대한 철학을 깊이 있게 설파하며 관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배 작가가 자유인의 방랑을 그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손을 댔다는 소식이 반가웠던 이유다.
연극 버전 <그리스인 조르바>는 현재 <라오지앙후 최막심>이라는 이름으로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명작을 동시대 한국관객과 소통하도록 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배 작가의 뚜렷한 역사의식이다. 배 작가는 원작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그저 낭만적인 자유인의 이야기가 아닌, 터키와 전쟁 중인 그리스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담은 작품으로 보고 있다.
(사진제공=명동예술극장)
시공간 배경은 터키로부터 독립투쟁을 벌이는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일제강점기의 연해주로 옮겨졌다. 무대는 연해주 근처에서도 제일 아래쪽의 얀코프스크 반도에 위치한, 무정부 상태인 조선인 촌락 풍경을 그린다. 조르바의 이름은 최막심으로 바뀌고, 이름 앞에는 떠돌이(라오지앙후)라는 별명을 붙였다.
극의 큰 틀거리는 대부분 원작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원작의 '나'와 자유인 조르바처럼, 지식인 김이문과 떠돌이(러시아어로 '라오지앙후') 최막심의 대비가 연극에서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김이문은 광산사업을 명목으로 삼아 얀코프스크의 작은 조선인 마을 앵화촌을 찾아가던 도중 최막심을 만나 친구가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겉으로는 환대하나 경계심을 갖고, 오르탕스 부인과 마을 바보인 천보, 조선과 러시아의 혼혈인 로사만이 반겨준다.
원작과 가장 큰 차이점은 '나'와 조르바의 수도원 방문 부분을 과감히 삭제하고 김이문과 최막심을 좀더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작가는 마을 사람들을 무지몽매한 덩어리로 그리는 대신, 역사의 아픔을 겪어내며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개별적 존재로 표현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을 사람들의 욕망과 격한 감정이 쌓이면서 결국 희생양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마을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하러 나간 아들과 남편을 기다리면서 살아남기 위해 아편농사를 짓는다. 일제 치하, 자유를 속박 당한 상태에서 울분을 삭이며 사는 마을 사람들은 일본인의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죄 없는 로사를 궁지로 몰고 간다. 로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감정은 독립운동을 나간 동네 청년의 사망 소식, 마을에 몇 안 되는 청년의 자살사건 이후 점점 격해진다.
어그러진 삶의 욕망을 위로하는 것은 결국 자본이다. 로사를 희생시킨 이후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을 여자들은 그녀의 값비싼 물건들을 온 몸에 걸친 채 욕망을 해소한다. 왕년에 4대 열강을 품었다고 자랑하는 오르탕스 여사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멋들어진 콧수염을 단 백인으로 상징되는 강대국의 남자들에게 희롱 당한 약자는 죽는 순간까지 육체적•물질적 욕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사진제공=명동예술극장)
'그리스인 조르바'를 '라오지앙후 최막심'으로 대체하면서 극에는 이처럼 비극적인 색채가 짙게 드리워진다. 낭만적인 자유가 아닌,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서의 자유에 방점이 더 크게 찍힌 셈이다. 최막심은 사람이 싫다면서도 그 진창 속에 원작의 조르바보다는 발을 더욱 깊이 담근다. 그러고나서 조르바처럼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할 지라도, 계속해서 도망친다'.
무겁게 다가오는 극의 내용은 연출가 양정웅의 대중적이면서도 세련된 연출감각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무대 앞쪽에 가득 깔린 흙은 육체와 욕망의 덧없음을 표현하고, 중앙에는 거대한 붉은 철판이 위치해 방향과 높낮이를 달리 하며 인간의 광기와 욕망을 상징한다.
무대 뒤 스크린에 비친 영상의 경우 극 중 상황을 설명하는 용도로만 쓰인다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무대와 적절히 어우러지는 질감 덕분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영상은 검은 얼룩이 묻은 빛 바랜 텅 빈 화면을 기본바탕으로 삼는다. 이 위로 화면들이 겹겹이 쌓여가며 마치 기록되지 않은 오래된 역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뮤지컬 배우인 남경읍에게 라오지앙후 최막심 역을 맡긴 것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차하면 노래하고 춤 추는 자유인 최막심은 배우 남경읍과 절묘한 화학반응을 빚어낸다.
손풍금과 기타, 우쿨렐레 등의 라이브 연주는 볼 거리와 들을 거리를 함께 제공한다. '코스모스 탄식', '연해주 천리길', '아리랑 그리운 나라', '이태리의 정원', '울어라 문풍지', '화류춘몽' 등의 근대가요는 극 중간중간 울려 퍼지며 약자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대변한다.
원작 니코스 카잔차키스, 번안 배삼식, 연출 양정웅, 출연 남경읍, 한윤춘, 오미연, 유순철, 이용이, 지춘성, 안태랑, 박호석, 천정하, 전중용, 김대진, 한철훈, 박하진, 계지현, 강보라, 이현균, 김리나, 김수정, 김호준, 하찌(연주), 작곡·음악감독 하찌, 무대 이윤수, 조명 여국군, 의상 김영지·박소영, 분장 채송화, 소품 이은규, 영상 김장연, 음향 최환석, 안무 강미선, 무술감독 이국호, 6월2일까지 명동예술극장(월·화 공연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