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오늘은 스승 공경의 마음을 되새기는 스승의 날이다. 그러나 예전보다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됐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교권 추락, 왕따 문제, 학교 폭력 등으로 일부 학교현장이 얼룩지면서부터다. 이즈막의 스승의 날에 필요한 것은 의례적인 감사 표시보다는 스승과 학생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는 속 깊은 대화일는지도 모른다.
직접적인 대화가 쑥스럽다면 문화생활을 공유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겠다. 마침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어른의 시간>이 공연 중이다. <어른의 시간>은 교육현장의 깊은 상처에 대한 씻김굿 같은 역할을 하는 연극이다. 이 씻김굿은 비단 스승과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모, 나아가 단죄와 격리에 익숙한 우리사회에도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한 남자가 교사를 그만두고 한적한 시골집에 살고 있다. 20년 전 남자가 담임을 맡던 반에서는 집단 따돌림과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남자는 그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교사직을 그만 둔 상태다. 극은 20년 전 살인사건을 일으킨 왕따 학생의 교도소 출소 소식을 들은 남자가 그 학생과 당시 급우들을 불러 동창회를 열면서 시작된다. 이 기묘한 동창회가 모인 이들 모두에게 일종의 제의, 굿판 같은 역할을 한다. 이곳에서는 20년 전 '아이의 시간'을 회상해보는 '어른의 시간'이 흘러 간다.
(사진제공=바나나문프로젝트)
왕따에 앙심을 품고 급우 다섯 명을 살인했던 김창수가 참여하는 동창회. 아무리 복역을 마치고 돌아왔다지만 분위기가 화기애애할 리 없다. 일본 희곡작가 가네시타 다쓰오는 어렵게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을 위해 충격의 수위가 다소 센, '어른의 시간'을 마련한다. 간헐적으로 삽입되는 총과 전기톱 소리, 강렬한 조명 등 극에 사용되는 충격 장치는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 한편, 하나같이 인물들의 어그러진 내면을 표출하는 역할을 한다. 충격요법은 단순한 효과로 그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진실된 정체성을 캐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다시 한번 끄집어 낸 과거는 모두의 상처를 건드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김창수, 제자의 살인에 대한 책임으로 사직한 교사 이현철, 그 충격의 여파에 시달린 부인 김경자, 사랑하는 이를 희생당한 최종혁, 당시 반장이자 현재는 교사로서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홍명준, 김창수의 추종자이자 과거의 아픈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서병탁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무대 위 배경도 인물들의 내면처럼, 왕따 문제로 고충을 겪는 학교현장처럼 황폐하기 그지 없다. 태극기와 칠판, 책걸상이 놓여있는 폐가는 소통부재로 신음하는 학교현장과 우리사회의 '진짜 얼굴'이다.
<어른의 시간>은 학급 내 서로 간 깊은 상처로 고민하는 스승과 학생이 함께 볼 만한 연극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의미에서 공연이 일반 관객에게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극이 어둡고 긴장된 분위기로만 일관할 것이란 오해는 금물이다. 마을 이장의 안내방송, 인터넷 댓글 등 긴장을 이완하는 몇몇 장치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을 짓게 한다.
무엇보다도 배우의 연기가 출중하다. <공공의 적>, <조용한 가족>, <와일드 카드>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해 존재감 있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 한성식, 극단 작은신화 단원인 송현서를 비롯해 송영학, 이종윤, 최영열 등 어느 한 명 빼놓을 것 없이 모든 배우들이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며 고른 연기력을 보인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창수 역의 유승일의 의뭉스러운 눈빛 연기가 일품이다. 유승일은 이 작품으로 올해 서울연극제 미래야솟아라 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 가네시타 다쓰오, 번역 기무라 노리코, 각색·연출 임세륜, 제작 극단 다(Da), 출연 한성식, 송현서, 유승일, 송영학, 이종윤, 최영열, 무대 이소영, 의상 정현정, 사운드·음악 김민주, 6월2일까지 예술공간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