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안톤 체홉은 세계 최고의 극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국내에서 체홉의 단막극은 자주 공연되지 않는다. 단막극 한두 편만 올리기에는 길이가 다소 짧고, 여러 작품을 묶자니 작업이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체홉의 인물들을 무대로 불러내려면 체홉이 꼼꼼히 구축해 놓은 인물의 내면 세계를 제대로 읽어내야 한다. 극의 길이가 짧다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프로젝트박스 시야의 기획공연시리즈 '14人(in) 체홉'이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려 다섯 편의 단막극을, 한 연출가의 지휘 아래 14명의 배우가 돌아가며 공연한다. 중책을 맡은 연출가는 극단 이안의 대표 오경택씨다.
오씨는 "체홉의 전 작품을 공연하고픈 욕심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체홉에 푹 빠져 있는 연출가다. <세자매>, <갈매기>, <벚꽃 동산> 등 체홉의 주요 장막극을 잇따라 올리면서 '체홉 전문 연출가'라는 별명도 얻었다. 지난 18일 시연회 후 이어진 간담회에서 오씨는 "공연 프로젝트 제목 중 '인'이라는 글자는 '사람(人)'이라는 뜻 외에 영어의 '빠지다(in)'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확히 따지자면 프로젝트 제목은 '14人(in) 체홉'이 아니라 연출까지 합친 '15人(in) 체홉'으로 고쳐 불러야 옳을 지도 모른다.
체홉의 매력에 대해 오 연출가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첫 손에 꼽았다. "체홉은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참으로 뛰어난 극작가입니다. 그리고 따뜻하죠. 체홉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인생은 괴롭고 불행하지만 그래도 살아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지만 삶이 유한하므로 이 고통 역시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것, 고통스런 삶 속에서 때로는 누군가를 사랑해보기도 하면서 각자 살아갈 만한 가치를 찾아나가는 것, 이것이 체홉이 말하는 인생이라는 설명이다.
이번 '14人(in) 체홉'은 총 5편으로 구성된다. <백조의 노래>, <곰>, <청혼>, <담배의 해로움에 관해> 등 체홉의 단막극 4편과 단편소설인 <불행>이 무대화된다. 하루에 3~4개 공연 연습을 진행해야 하는, 물리적으로만 따져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작품 수도 많은 데다 체홉의 인물에는 정형성이란 게 없어요. 분량에 관계 없이 인물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게 힘들었습니다." 오씨의 연출 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연출은 에너지가 고갈되기는커녕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텅 빈 극장 안에서 배우로서의 인생에 대해 털어놓는 작품인 <백조의 노래>의 경우 현재 배우 박정자가 열연하는데, 향후 다양한 선배 배우들과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는 꿈도 피력했다. "한 평생 연기하신 선생님들과 어느 극장의 어떤 무대에서 올려도 좋을 작품이에요. 공연이 없는 월요일마다 극장의 빈 공간에서 다양한 배우 선생님들과 이 작품을 함께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14人(in) 체홉'의 무대 뒤편 커튼 사이로 관객들은 공연 내내 자전거나 트렁크, 책상, 의자 등을 볼 수 있다. 이 다양한 소품들은 무대에서 직접 사용되지 않지만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눈 앞에 계속 존재한다. 체홉 4대 장막극의 주요 모티프인 '주인 없는 공간'을 염두에 두고 꾸린, 물건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이 '14人(in) 체홉' 속 다채로운 5개의 작품을 묶어내는 상징적 테마로 기능한다.
"무대 소품을 통해 인생은 결국 사라져간다는 것, 잠깐의 여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었다"는 게 연출가는 말한다. 삶에 대한 울분을 뒤로 하고 체홉이 건네는 심심한 위로를 경험해보자. 내 삶도 결국 내 것이 아니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14人(in) 체홉'은 7월7일까지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작 안톤 체홉, 연출 오경택, 무대 정승호, 조명 김광섭, 음악 지미 세르, 의상 한혜자, 소품 권보라, 노주연, 분장 백지영, 출연 박정자, 최용민, 박상종, 김태훈, 유준원, 우현주, 서정연, 박소산, 정수영, 전미도, 김태근, 구도균, 이창훈, 이은, 주최 프로젝트박스 시야, 제작 프로젝트박스 시야, 극단 맨씨어터, 극단 이안.
(사진제공=프로젝트박스 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