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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민주주의의 원형에 '지금, 여기'를 비춰보다
입력 : 2013-06-27 오전 9:18:17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절묘하게 시기가 맞아 떨어졌다. 우리극연구소 20주년을 맞아 연희단거리패가 이달 30일까지 공연하는 '오레스테스 3부작' 이야기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시국에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하는 연극이 대학로에서 공연 중이다. 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을 연희단거리패 꼭두쇠 이윤택이 오늘의 눈으로 다시 구성했고, 연희단거리패의 대표 배우 김소희·김미숙·이승헌이 공동연출을 맡았다. 정치와 예술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 민주주의의 장으로 기능한 고대 그리스 극장이 '지금, 여기' 버전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사진제공=게릴라극장)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을 본다는 것은 격렬한 토론을 거쳐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행위였다. 당시 그리스 비극경연대회에서 총 13번 우승한 베테랑답게 아이스킬로스가 '오레스테스 3부작'을 통해 꺼내 든 내용은 만만치 않다. 전쟁 영웅 아가멤논과 부인 클리테메스트라의 팽팽한 심리전, 남편을 도끼로 쳐죽인 클리테메스트라와 시민들의 설전(이상 <아가멤논>), 어머니의 손에 죽은 아버지를 위해 제사 지내는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모습,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하는 오레스테스(이상 <제주를 바친 여인들>), 아폴론 신의 조언을 따라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보호하는 도시 아테네로 향하는 오레스테스, 그곳에서 '남편을 죽인 아내'와 '어머니를 죽인 아들' 중 누가 옳은가를 두고 논하는 오레스테스와 복수의 여신들(이상 <자비로운 여신들>)에 이르기까지 가치 판단하기 쉽지 않은 복잡다단한 문제가 극의 전면에 드러난다.
 
얼핏 보면 왕족 가문에 흐르는 피의 잔혹사이지만 '오레스테스 3부작'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민주주의의 절차, 그리고 공동체 인식이다. 이윤택이 새롭게 대본을 각색하면서 이 부분이 더욱 선명해졌다. 주제를 강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은 관객과 비슷한 입장에서 비극을 지켜보는 코러스(고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일종의 합창단)다. 코러스는 무대 위 사건을 보며 이야기와 춤, 노래를 통해 일반 시민의 생각을 대변한다. 특히 이 연극에서는 코러스가 집단이 아닌, 각자의 입장을 지닌 개인으로 등장해 흥미를 더한다. 아예 관객석에 앉은 채 대화를 주고 받는 배우 이승헌과 김철영, 제사의식에서 춤과 노래를 주도하는 배우 김미숙의 모습은 배우 김소희가 분한 '복수의 화신' 클리테메스트라만큼이나 큰 존재감으로 극의 흐름을 쥐락펴락한다.
 
귀에 꽂히는 직설적인 대사 역시 관객으로 하여금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게 한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저 안에서 벌어진 추악한 일을 모른 척해야 하나?', '시민은 근본적으로 힘이 없어요. 변화를 원할 때 행동해야만 힘이 생기고 그럴 땐 놀라운 일이 일어나죠. 하지만 그들이 변화를 원하지 않을 때는 움직이려 들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힘이 없어요' 같은 날카로운 대사가 극 중 내내 오가기 때문에 장장 3시간 10여분에 이르는 공연 시간 동안 나가는 관객은 있을지언정 조는 관객이 없다.
 
급기야 극 말미에 이르면 아테네의 신전 앞에서 관객들을 투표에 참여하게 된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오레스테스와 오레스테스를 처단해야 한다는 복수의 여신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편만 선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격한 감정의 말을 거둬내고 보면 양 쪽 모두에 논리적인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어렵게 마음을 정하고 투표를 행하지만 나의 판단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온전히 확신하기가 힘들다. 눈 부실 정도의 새하얀 신전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테네, 아폴론 신마저도 결국 자신의 입장에서 판결하고 변호한다. 투표를 거쳐 재판의 결론이 나도 그 결과에 100% 승복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야기는 결코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극에서 강조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는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분명해진다. 판결 이후에도 승자와 패자, 중재자 간 끊임없이 제안과 설득이 이어지고, 한바탕 춤판을 열어 산 자와 죽은 자까지 모두 불러내 공동체의 진정한 화합에 근접해질 때 비로소 연극은 마무리된다. 이처럼 연희단거리패의 '오레스테스 3부작'이 이야기하는 민주주의의 절차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공동체의 가치란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가까스로 지켜낼 수 있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존재로 그려진다. 
 
작 아이스킬로스, 번역 김창화, 대본 이윤택, 공동연출 김소희,김미숙, 이승헌, 출연 김소희, 김미숙, 이승헌, 이재현, 배보람, 김철영, 홍민수, 손청강, 김아라나, 임현준, 염석무, 김아영, 황설하, 김태현, 이승민, 서민우, 이성숙, 김사이, 30일까지 게릴라극장.
 
김나볏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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