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연극은 가볍다. 극단을 이끄는 연출가 이수인이 추구하는 시적·음악적 화법 때문이다. 공연의 중심에 배우의 말과 춤이 있지만 이 중심은 곧 분절되고 해체된 채 극장을 부유한다. 결과적으로 극은 소리와 이미지 위주로 흘러간다. 그래도 난해하지는 않다. 표면은 가벼울지언정 극에 담은 내용이 현실의 중력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연출가가 빚어낸 '유쾌하고 슬픈 농담' 속에서 관객은 유영하며 자연스레 포획되는 말과 춤을 즐기면 된다.
연출가의 말을 빌자면 그의 극에서는 '주제나 관점보다는 태도나 접근방식이 더 중요'하다. 지난해 5월 두산아트랩 쇼케이스 무대를 거쳐 올 여름 완성작으로 공개된 <왕과 나>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왕과 나>는 대중에게 익숙한 숙종대왕과 숙종비 장옥정의 사랑 이야기, 서인에게 핍박 받던 남인이 서인세력 견제를 위해 장옥정을 장희빈으로 만드는 과정 등을 아우른다. TV드라마를 통해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무대화된 장희빈 이야기는 드라마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풍긴다. 공연이 주목하는 것은 이야기 안에 숨겨진 권력과 사랑의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왕과 나>에서는 역할도, 줄거리도, 음악도, 춤도 모두 조각난 채 흘러간다. 이 덕분에 극적 전개에 몰입해서 보게 되는 TV드라마와는 달리, 무대와 한발짝 떨어져서 삶에 대해 관조하는 식의 감상이 가능하다. 경쾌하면서도 약간은 음란한 노래와 대사로 인해 궁중의 비극적 연애담과 암투는 곧 무장해제된다. 이 과정에서 부각되는 것은 '일방의 살해로 끝을 맺는다'는, 사랑과 권력의 공통된 속성이다. 사랑과 권력의 속성을 나란히 두고 비교한다는 컨셉트는 각각 양복과 한복으로 구분되는 남녀 배우의 의상에서도 드러난다.
무대 위 소품은 긴 소파 하나와 의자 몇 개, 마이크 두 개가 전부다. 이 헐벗은 무대를 배우들이 극중 캐릭터, 해설자, 자기자신 등으로 계속해서 역할을 바꾸며 채워나간다. '이 이야기는 100% 사실이지만 대체로 거짓말'이라는 식의 헛헛한 말장난과 농담이 흐르고 줄거리는 자꾸 옆길로 샌다. 이때 관객의 할 일은 두뇌 활동을 잠시 더디게 하고 감각의 촉수를 활짝 여는 것이다.
대강의 줄거리가 진행되는 동안 배우들은 기타와 타악기의 라이브 연주를 타고 '쿠쿠루쿠쿠 팔로마', '청춘고백', '우산', '나는 열아홉살이에요', '뜨거워서 싫어요',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당신의 첫 사랑', '꿈 속의 사랑을' 등의 노래를 부른다. 수많은 사랑노래 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까에따누 벨로주의 '쿠쿠루쿠쿠 팔로마'다. 가사 중 '쿠쿠루쿠쿠', '아야야야야' 같은 의성어가 극의 흐름에 맞게 능청스런 유머를 담은 대사로 풀려 나와 총체극다운 재미를 더한다.
무대 앞, 스탠딩 마이크의 쓰임새는 극의 컨셉트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극이 진행되는 도중 배우들이 마이크를 쓰는 순간은 단 두 번. 한 번은 숙종에 의해 숙청된 사람의 이름들이 흘러나오고, 또 한 번은 숙종이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들이 나열된다. 이 기록된 이름은 다름아닌 권력과 사랑에 대한 인간 욕망의 상징이자 흔적이다.
한바탕 춤과 말의 향연이 흘러간 자리에서 욕망은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치다가 결국 희미하게 사그라든다. 숙종의 차가운 냉대 속에 장옥정의 격렬한 춤사위까지 펼쳐지고 나면 이제 정말 모든 게 끝이 난다. '세월은 흘러갑니다. 강물보다 빠르게' '사랑은 식어갑니다. 용암보다 신속히'와 같은 주석이 달린, 눈 앞에 펼쳐지는 농담 같은 삶에 낄낄거리고 웃다가도 막이 내린 후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애잔한 감상이 마음 가득 남는 연극이다.
작·연출 이수인, 출연 송흥진, 황택하, 곽지숙, 미경, 이길, 이현호, 박창순, 민정희, 김신록, 조혜선, 류성철, 김누리, 강경호, 김솔잎, 음악감독 명현진, 조명 이동진, 음향 시스템 신승욱, 의상 남하림, 기획제작 극단 떼아뜨르 봄날, 공동기획 두산아트센터, 공동제작 모두스미디어, 8월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