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K리그 무명 선수 이정협(24·상주상무)의 깜짝 등장. '신데렐라'·'황태자'란 수식어와 함께 아직 축구 국가대표팀에 외국인 감독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 한 골이었다.
이정협은 지난 4일 호주 시드니 퍼텍스타디움에서 열린 사우디와 평가전에서 후반 27분 교체 투입돼 2-0으로 승부를 확정 짓는 쐐기골을 터뜨렸다.
남태희(레퀴야)의 패스를 받은 김창수(가시와레이솔)가 골문 앞으로 낮게 깔리는 패스를 연결하자 쇄도하던 이정협이 발을 갖다 대 골을 만들었다.
이 골로 철저한 무명이던 그는 자신을 향한 여론을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바꿨다. 대표팀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도 경기 후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기대대로 이정협이 골을 넣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축구대표팀의 이정협. (사진=대한축구협회)
◇"다섯 번 보고 뽑았다"
이정협이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10일 대표팀의 제주도 전지훈련 명단 발표부터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직접 다섯 번을 지켜본 선수다. 경기당 25분 정도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기에 선발했다"며 이정협을 향한 관심에 답했다.
이동국(전북현대)과 김신욱(울산현대)이 부상으로 낙마하며 공격수 부재에 시달리던 대표팀이었지만 이정협을 뽑을 것이란 예상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는 연령별 대표팀을 지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소속팀인 상무에서조차 올 시즌 후보였다. 시즌 마지막 경기인 경남FC전에서 2골을 몰아치며 K리그 챌린지(2부리그) 38라운드 베스트11에 꼽히긴 했지만 대표팀 스트라이커까지 거론되지는 않았다.
숭실대를 졸업하고 2013년 부산에서 K리그에 데뷔해 일찌감치 군에 입대한 선수 정도로 분류됐다. 186cm의 장신이지만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스트라이커는 흔하다는 게 축구계의 평가였다. 하지만 지난달 22일 아시안컵 최종 명단에도 이정협의 이름이 오르자 여론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외국인 감독 아니면 어려웠을 듯
이정협의 이번 대표팀 깜짝 발탁은 여전히 축구계에서 외국인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평이다. 흔히 말해 '축구 엘리트'의 길을 걷지도 않았고 비주류에 가까웠던 그가 선입견 없는 환경에서 발탁됐다는 것이다.
이는 축구계에 박혀 있는 고정관념을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선수만을 뽑은 슈틸리케 감독의 의지가 만들어낸 성과라는 뜻이다. 실제 슈틸리케 감독이 K리그 경기장을 살피면서 자신이 파악하기 전에 특정 선수와 관련한 어떤 것도 설명하지 하지 말 것을 관계자에게 부탁한 일화는 유명하다.
한 축구계 관계자는 "이정협의 활약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분명한 '깜짝 발탁'이고 선수를 바라보는 기준에 선입견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며 "아직 외국인 감독이 있어야 함을 팬들이 먼저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지성·조원희 등 외국인 감독이 발굴
과거 2002 한일월드컵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은 송종국, 박지성, 이영표(이상 은퇴), 김남일(교토상가) 등 대표팀과 인연이 없던 선수들을 핵심 전력으로 썼다. 당시 파격적인 선택을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결과는 월드컵 4강 진출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과는 이후 네덜란드 출신의 외국인 감독이 국내에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스타 탄생을 기대하는 여론의 분위기로 이어졌다.
2006 독일월드컵을 지휘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무명에 가까웠던 조원희(오미야)를 오른쪽 수비수로 깜짝 발탁했다. 조원희는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한 뒤 훗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위건까지 진출했다. 아드보카트 감독의 발굴로 그는 한국인 6번째 프리미어리거까지 오른 셈이다.
2007 아시안컵을 이끈 핌 베어벡 감독은 조재진(은퇴)을 자신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최전방 공격수로 꼽으며 기존의 이동국이나 박주영(알샤밥)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이 때문에 슈틸리케 감독이 이정협을 깜짝 발탁한 것과 그가 데뷔전에서 골까지 넣은 것을 두고 발전 가능성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크다. 1경기에서 약 18분을 뛴 게 전부이지만 최전방 공격수 부재에 시달리는 대표팀의 현 상황은 이정협의 향후 중용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한편 아시안컵 A조에 속해있는 대표팀은 오만(10일), 쿠웨이트(13일) 호주(17일)와 차례로 조별리그를 펼친다. 최소 조 2위에는 올라야 대회 8강에 진출할 수 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 (사진=대한축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