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하청노동자의 눈물②)위험은 아래로 흐른다
다단계 하청구조 속 안전 책임 점점 옅어져
잠복기 긴 직업성암 특성에 ‘셀프 입증’ 불가
2017년 대법 판결에도 ‘근복’ 기업 입장 대변
2026-04-02 06:00:00 2026-04-02 06:00:00
[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 생산 공정의 고도화·자동화로 반도체 클린룸은 대부분 ‘무인 시스템’에 가까운 공간이 됐지만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설비가 멈추거나 고장이 났을 때, 또는 정기적으로 내부를 열어 점검·청소할 땐 사람 손이 필요합니다. 하청 노동자들이 주로 하는 업무입니다. 반도체 산업의 고도화된 자동화 이면에는 위험을 공정 하단부로 밀어내는 외주화 구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위험은 아래로 흐르고 있습니다. 원청에서 1차 협력사, 다시 2차 소사장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하청 구조 속에서 안전관리 책임은 아래로 갈수록 희미해집니다. 업체는 수개월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고, 도급업체 간판만 바꾼 채 같은 공정에 새로운 노동자를 투입합니다. 질병 잠복기가 긴 직업성 암과 희귀질환의 특성상 개인이 자신이 어떤 물질에, 얼마나 노출됐는지를 입증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 반도체 공장 내부. (사진=삼성전자)
 
△웨이퍼(원판) 제조 △산화 공정 △포토 공정(노광) △식각 공정(에칭) △박막·이온 주입 공정 △금속 배선 공정 △EDS(검사·Electrical Die Sorting) 공정 △패키징 등 8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반도체 생산 과정은, 수많은 협력사가 거미줄처럼 얽혀 돌아가는 분업의 집약입니다. 분업 구조에서 설비 내부 찌꺼기를 닦아내는 설비 점검(PM)과 독성 케미컬을 채우고 배관을 관리하는 CCSS(화학물질 공급), 농축된 슬러지와 폐화학 물질을 다루는 폐수·폐기물 처리 등은 협력사의 손으로 이뤄집니다.
 
웨이퍼를 가공하고 남은 찌꺼기를 막대기로 치고 떨어뜨리는 일, 찢어지기 쉬운 비닐장갑에 의지해 아세톤과 유기용제를 만지는 일은 자동화의 영역 밖입니다. 생산 효율 향상을 위한 ‘지저분한 일’은 하청업체가 떠맡습니다. 반도체 업계에선 자동화가 안전을 높였다고 말하지만, 위험은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평상시 공정은 기계가 담당하고, 사람이 개입하는 순간 되레 위험해지는 역설입니다. 정규직이 관제실에서 모니터를 보며 설비 상태를 체크할 때, 유해 물질이 남아 있는 기계 안으로 몸을 넣는 이들은 수개월짜리 계약직 노동자들입니다.
 
위험의 이동은 정보의 비대칭성에서도 비롯됩니다. 이종란 노무사(반올림 활동가)는 <뉴스토마토>와 한 인터뷰에서 “하청업체는 원청으로부터 정확한 물질 성분조차 공유받지 못한 채, 단순 작업 지시만 받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며 “영업비밀과 국가 핵심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물질 정보를 가로막으면서, 노동자의 알 권리는 사실상 봉쇄돼 있다”고 했습니다.
 
후공정 업체 스태츠칩팩코리아에서 일하다 재해를 입은 A씨가 한 예입니다. 지난 2020년 고교 현장실습생으로 입사한 A씨는 설비 세정 업무한 지 1년2개월 만에 독성 간질환에 걸렸습니다. 사측은 그가 화학물질 유기용제가 아닌 ‘물’만 만졌다고 주장했고 근로복지공단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독성 간질환이 업무와 연관성이 없다며 산재 불승인 처분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환경부 화학물질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해당 기업에선 혼합물을 포함해 365종의 화학물질(2022년 화학물질 통계조사 결과 기준)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이 노무사는 “A씨가 세정실에 들어가면 ‘코에 소주병을 갖다 댄 것보다 독한 냄새’가 났고, 비닐장갑이 자주 찢어지며 손 허물이 벗겨지는 경험을 반복했다고 하더라”며 “사용하는 유해물질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자가 업무 연관성을 입증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3월6일 반올림이 삼성전자 서초 사옥 앞에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앞서 대법원은 삼성전자 엘시디(LCD) 공장 노동자의 다발성경화증을 산업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지난 2017년 8월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삼성전자 천안 공장에 근무하다 다발성 경화증이 발병한 ㅇ씨(42)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에서 “발병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희귀질환이더라도 여러 유해 요인이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 등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며 원고 패소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ㅇ씨는 18살 때인 2002년 11월부터 삼성전자 천안 엘시디 공장에서 엘시디 패널 검사 작업을 하다 발병해 2007년 2월 퇴사한 뒤 2008년 9월 다발성경화증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ㅇ씨는 2010년 7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요양 신청을 했으나 공단이 승인하지 않자 소송을 냈습니다.
 
다발성경화증은 한국에서 인구 10만명당 3.5명이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진 희귀질환입니다. 발병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유기용제 노출 또는 젊은 나이의 교대근무 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7년 기준 삼성전자 반도체 및 엘시디 사업장에서만 ㅇ씨를 포함해 최소 4명의 다발성경화증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대법원은 △ㅇ씨가 입사 전 건강에 별 이상이 없고 가족력 등이 없는데도 엘시디 공장에 근무하던 중 이 병의 평균 발병 연령(38살)보다 훨씬 이른 21살 무렵부터 다발성경화증이 발병했고 △다발성경화증의 발병 요인으로 거론되는 유기용제 노출, 주·야간 교대근무, 햇빛 노출 부족, 업무상 스트레스 등이 ㅇ씨에게 다수 중첩되면 다발성경화증의 발병과 악화에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가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재판부는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요양 불승인의 근거로 삼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방식 자체에 한계가 있었던 데다, 삼성전자와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천안지청이 엘시디 공정에서 취급하는 유해화학물질 등에 관한 정보가 영업비밀이라며 공개를 거부해 ㅇ씨가 유해화학물질의 구체적 종류나 노출 정도를 증명하는 것이 곤란해진 특별한 사정도 인정된다”며 “이 점도 ㅇ씨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엘시디 공장 노동자의 산재 사건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 사례는 하급심에서 여러 차례 있었으나,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앞서 대법원은 유해화학물질 노출에 의한 직업병의 경우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될 필요는 없고, 근로자의 취업 당시 건강 상태, 작업장의 유해 요인 유무, 작업장에서 근무한 기간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며 피해자인 원고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는 판결을 여러 차례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작업장의 유해 요인을 하나하나 따로 떼어내 개별 요인마다 위험 정도를 판단하는 등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관행은 여전합니다. 그 사이 하청 노동자들은 업체 폐업과 계약 갱신 탓에 노출 이력을 증명할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산재 불승인 처분을 받고 있습니다.
 
이종란 반올림 활동가(노무사)가 반도체 산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노동자를 위협하는 것은 화학물질만이 아닙니다. 방사선 노출 위험 역시 상존합니다. 지난 2024년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내놓은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방사선피폭사건 조사 결과'를 보면, 기흥 사업장에는 694대의 방사선 발생 장치가 있지만, 이를 담당하는 전문 방사선안전관리자는 단 2명뿐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관리자 1명이 350대의 기기를 책임져야 하는 실정입니다. 이 노무사는 “실질적인 점검이나 제대로 된 관리가 불가능에 가깝다”며 “방진복이나 마스크가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고 노동자들은 화학물질과 방사선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웨이퍼를 가공하고 이를 태워서 봉투에 담고 청소하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생산 효율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자동화를 하지 않은 것 같다”며 “보이지 않은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선 아직 보호가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반도체 공장 생산라인을 지키는 오퍼레이터와 엔지니어들이 직접 위험에 노출됐습니다. 19년 전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씨처럼 웨이퍼를 화학물질이 담긴 수조에 담갔다 빼는 작업이나 유해물질 탱크를 수동으로 교체하는 업무를 도맡았습니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 등 혈액암 유병률이 다른 산업에 비해 눈에 띄게 높았던 원인이었습니다.
 
황씨 사망 이후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반도체 직업병 피해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2008년 첫 집단 산재 신청 이후 올해 2월5일까지 반올림에 접수된 산재 신청 수는 211명. 백혈병·림프종 같은 혈액암, 유방암·뇌종양, 젊은 노동자들의 희귀 난치성 질환과 자가면역질환까지 스펙트럼도 넓습니다.
 
그럼에도 산재 인정 문턱은 여전히 높습니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반도체 관련 직업병으로 산재 승인을 받은 사례는 약 115명 수준으로, 인정률은 절반 정도에 그칩니다. 반도체 공정 특성상 ‘어떤 특정 유해 인자가 얼마만큼 노출됐는지’를 개별 사건마다 규명하기 어렵고, 현실의 역학조사는 피해자에게 인과관계 입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3회에선 반도체 산재 예방을 위한 해외 사례와 함께 실효성이 떨어지는 대책 등 노동자 안전 제도의 공백을 다룹니다.
 
백아란 기자 alive02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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