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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클래식에 동시대의 소리세계를 더하다
기돈 크레머 & 크레메라타 발티카 내한공연
2012-10-18 17:33:51 2012-10-18 17:35:18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고전 클래식에서 현대음악까지 아우르는 풍성한 레퍼토리가 돋보인 공연이었다. 16일과 17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돈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내한 공연은 동시대적 소리세계를 한껏 펼쳐 보이며 가을 밤의 서정을 한껏 부풀게 했다.
 
전세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는 자신의 1641년산 바이올린으로부터 나는 소리에 시종일관 귀를 기울이며 음악에 완전 몰입한 모습이었다. 기돈 크레머가 이끌고 있는 소규모 챔버 오케스트라인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거장의 소리에 끊임없이 반응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잃지 않는 영민함을 보였다. 
 
클래식과 동시대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몇몇의 장치가 기돈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만의 독특함을 빚어냈다.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거장 크레머가 연주자로 나섰다는 점 외에 가장 돋보인 것은 프로그램의 구성이다. 다소 난해한 현대음악에다 익숙한 고전음악을 섞어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까지 최대한 배려한 모습이었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연주방식도 동시대 관객에게 어필하는 요소였다.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를 표방하는 단체의 연주자들 23명이 공연내내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음악색채도 독특했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3국 출신의 이들은 개성적인 지역색을 드러내며 짙은 잔상을 남겼다.
 
 
 
 
 
 
 
 
 
 
 
 
 
 
◇ '사회주의 리얼리즘' 대표하는 바인베르크 곡 돋보여
 
16일 화요일 공연은 브루크너에서 바인베르크, 쇼스타코비치, 슈만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첫 연주곡은 브루크너의 '현악 5중주 F장조, WAB 112 중 3악장 아다지오'로, 크레머 없이 크레메라타 발티카만 등장해 연주했다.
 
브루크너의 곡은 현대음악 중에서 비교적 어렵지 않은 곡으로 꼽힌다. 작은 트레몰로 소리로 시작해 크레센도로 나아가는 브루크너 음악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는 이 곡을 통해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신비로운 명상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느리고 평온하며 부드럽고 감미로운 선율은 마치 아침 산책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바이올리니스트 각각의 개성이 드러나게 편성된 이 곡은 크레메라타라는 단체를 소개하는 인트로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음악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후 마침내 흰 셔츠를 입은 기돈 크레머가 등장했다. 크레머의 첫 선택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꼽히는 바인베르크의 '교향곡 제10번 a단조, Op.98'이었다. 1악장의 합주 협주곡이 특히 인상적인 이 곡은 러시아적 느낌으로 웅장하게 시작되는 불협화음이 일품이다.
 
단호하고 명쾌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기돈 크레머의 연주가 유감없는 매력을 발휘했다. 합주협주곡에 이어 전원곡, 이탈리아 서정곡, 희가극, 전위로 나아가는데 터질 듯한 긴장감의 날카로운 첼로 독주가 펼쳐진 후 기돈 크레머가 이를 다시 받아 연주하는 등 마치 대화를 주고 받는 듯 긴밀한 연주가 돋보였다.
 
가늘고 희미하게 울리는 날카로운 높은 음과 좀처럼 듣기 힘든 콘트라베이스 독주의 대비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냈으며, '웅' 하고 날라가는 듯한 현악기 음들은 과감하게 연주돼 듣는 이에게 시원함을 선사했다. 마지막에는 기돈 크레머의 바이올린 연주를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이어받아 음을 두껍게 만든 후 어디론가 내달리듯 빠르게 연주되다 첼로의 두들기는 소리로 이어지는 등 좀처럼 듣기 힘든 현대음악의 매력을 공연장 가득 발산했다.
 
이어지는 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Op.134'에서는 기돈 크레머가 발 뒤꿈치까지 들며 특유의 집중력으로 연주하는 가운데 트라이앵글, 심벌, 팀파니, 드럼 소리가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살렸다. 
 
르네 쾰링이 편곡한 슈만의 곡 '첼로협주곡 a단조, Op.129'도 현악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바탕으로 바이올린이 독주하는 느낌을 자아내며 대담한 인상을 남겼다. 다만 악장과 악장 사이 관객석에서 기침소리가 마구 터져나오며 음악의 맥을 끊어 아쉬움을 자아냈다. 마지막 앙코르 곡으로는 관객의 귀에 익숙한 글렌 밀러의 '문라이트 세레나데'를 연주하며 첫날 공연을 매끄럽게 마무리했다.
  
◇ 바흐 명곡 통해 글렌 굴드와 조우
 
17일 수요일 공연에서도 전날과 같이 현대음악이 다수 등장했지만 일반관객에게 좀더 쉬운 곡들로 꾸려졌다.
 
이날 공연에는 연주자의 요청에 의해 예정된 프로그램 외 사이에 바인베르크의 곡이 하나 추가됐다. 전날에 이어 바인베르크의 곡이 두곡이나 소개된 셈인데 '바인베르크가 쇼스타코비치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기돈 크레머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무대를 연 패르트의 곡 '바이올린, 현악 오케스트라와 비브라폰을 위한 '파사칼리아'는 에스토니아 작곡가 패르트가 기돈 크레머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2007년에 헌정한 곡이다. 화려함과 강렬함이 돋보이는 이 곡에서 크레머와 크레메라타는 노를 젓듯 힘차게 연주하며 멜로디의 역동적인 굴곡을 제대로 살려냈다. 역동적인 연주에서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꿔 피치카토 주법으로 연주하는 등 오케스트라의 기량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바인베르크의 '바이올린과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티노 Op.42'는 전날 연주된 '교향곡 제10번 a단조, Op.98'보다는 어렵지 않은 곡이다. 기돈 크레머의 바이올린에 이어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다함께 같은 선율을 연주하는 대목에서는 가을느낌이 물씬 풍겼다. 조성이 변화한 이후에는 첼로, 비올라, 바이올린, 비올라, 콘트라베이스 순으로 주거니받거니 연주돼 마치 현악기들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뛰어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뒤이어 모두가 현을 튕기는 동안 크레머가 선율을 연주하며 곡이 마무리됐다.
 
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현대 작곡가들이 바흐의 건반 작품을 재구성해 만든 '기악 편성의 기법 발췌곡'이었다. 존 세바스찬 바흐와 글렌 굴드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실베스트로프, 라스카토프, 데샤트니코프, 티크마이어, 키시네 등이 작곡에 참여한 이 모음곡들은 바흐의 곡에 동시대적 느낌을 더해 완성됐다.
 
특히 실베스트로프가 작곡한 'J.S.바흐에게 헌정된 바이올린과 에코 사운드를 위한 곡'에서 부드럽고 은은한 비브라폰 소리 속에 울리는 바이올린 독주는 몽환적인 느낌마저 자아냈다.
 
에코 사운드와 바이올린이 서로의 소리에 공명하듯 잔잔히 울려퍼지다가 이윽고 비브라폰이 명확한 음을 내면 바이올린도 피치카토 주법으로 경쾌한 음을 낸다.
 
티크마이어가 작곡한 '굴드 풍으로 : 골드베르크 변주곡 No. 30, 4, 18, 26과 쇤베르크의 Op.19와 Op.47 중 세 개의 간주곡'도 가녀린 소리에다 쇤베르크의 날카로운 인터메초를 섞어 독특함을 자아냈다. 이어서 연주된 키시네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에서는 국내 공연에서 좀처럼 감상하기 힘든 풍경이 펼쳐졌다. 섬세하면서도 독특한 글렌 굴드의 레코딩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고 거기에 맞춰 기돈 크레머가 활을 놀린다. 마치 옆방에서 글렌 굴드가 연주하고 있고, 기돈 크레머가 그 음을 듣고 반응하는 듯한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됐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인 베토벤의 '현악4중주 14번 C#단조, Op.131'는 기돈 크레머와 빅토르 키시네가 함께 편곡해 조금 색다른 느낌이었다. 7개의 악장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이 곡은 죽음을 모티브로 하는 곡이다. 느리지만 생동감있게 시작되는 이 곡은 마지막 악장에서 웅장한 바이올린 현 소리로 이어지기까지 변화무쌍한 과정을 거친다. 크레머는 마지막에는 발까지 구르며 완전히 몰입해 단호하고 힘찬 연주를 선사했다.
 
둘째날 앙코르곡으로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크라이슬러의 곡 '사랑의 슬픔'과 피아졸라의 '미켈란젤로 70', 두 곡을 연주했다. '사랑의 슬픔'에서는 음절의 굽이굽이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연주로 감탄을 자아냈고, '미켈란젤로 70'은 퍼커셔니스트의 현란한 비브라폰 연주와 기돈 크레머의 날카로운 현이 어우러져 열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번 내한 공연은 늘 새로운 작품을 발굴하고 기존의 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힘쓰는 기돈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매력이 마음껏 발휘된 공연이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무아지경으로 빠져드는 거장의 연주, 그리고 15년간 크레머와 함께 하며 젊은 감각을 불어넣고 있는 크레메라타 발티카 단원들의 연주는 19일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21일 대전 문화예술의전당 아트홀에서도 계속된다(문의 크레디아, 1577-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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