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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북리뷰)문자와 디자인, 시로 통하다
독립출판시집 <세 개의 선>
2012-10-29 07:39:48 2012-10-29 07:41:39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시집의 기획자는 23명의 창작자에게 시를 청탁했다. 종이에 세 개의 선을 그려달라는 주문도 곁들였다. 마치 제시된 운자(韻字)에 맞춰 시를 짓는 것처럼 창작자들은 세 개의 직선을 그렸고 시를 써내려갔다. 세 개의 선은 각자의 시가 소개된 페이지 앞부분에 실렸다. 텍스트(문자)와 그래픽(디자인)이 어우러진 독특한 감성의 시집 <세 개의 선>은 그렇게 탄생했다.
 
원고 청탁을 받은 이들은 시인 김경주와 신해욱 외에 디자이너 김기조, 음악가 이민휘(무키무키만만수), 록 바에서 활동하는 봄눈별, 의문의 작가 폴 안첼 등 다양한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직업을 증명이라도 하듯 창작자들은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직선 세 개를 그렸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를 써내려갔다.
 
아무렇게나 찍찍 그은 선, 운율 따위는 무시하고 머릿 속 단상들을 나열한 시. 시집 <세 개의 선>에 대한 첫인상이다. 시와 선의 의미가 초반에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은 그 구성방식이 관습적인 것과는 멀기 때문이다. 책을 처음 접할 때는 익숙하지 않은 시와 그림의 나열에 당황하며 그저 책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게 된다. 그러나 다시 시집을 고쳐 잡고 세 개의 선을 시의 단서로, 시는 세 개의 선을 읽는 단서로 삼아 더듬더듬 읽다보면 문득, 희미하게 연결고리가 생기는 순간이 온다.
 
사진.그래픽 디자이너 윤재원의 시와 그림(사진)을 살펴보자. 윤재원은 두 개의 선을 서로 가깝게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선은 약간 떨어뜨려 놓았다. 그가 그린 세 개의 선에서는 따로 떨어져서 다른 두 사람을 관찰하는 작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세 개의 선 뒤에 이어지는 '(20)10년대의 사람들'이라는 시에서 윤재원은 관찰자의 입장에 서서 커다란 배낭을 메고 다니는 할머니와 작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아가씨의 모습을 대조했다. 또 다른 시 '어떤 날'에서는 버스에서 먼저 내린 엄마를 향해 팔을 벌리고 뛰어내리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작가는 '우연히 목격한 장면 때문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어떤 날'을 역시 제3자로서 묘사한다.
  
루마니아 출생이고 현재는 서울에서 살고 있는 폴 안첼은 노이즈 뮤지션이다. 그의 시 '3 True Friends(진정한 세 친구들)'는 무척 짧으니 전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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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로 읽어도 세로로 읽어도 같은 내용인 안첼의 시는 순수한 무의미의 세계를 지향하는 독일의 구체시를 연상시킨다. 언어로부터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 알파벳을 무의미하게 흩어 놓는다든지, 하나의 동일한 단어만을 반복해서 늘어 놓는다든지 하는 식이다. 구체시의 대가 이름을 아예 시의 제목으로 삼은 '에른스트 얀들(Ernst Jandle)'이라는 시에서 이같은 양상은 더욱 도드라진다. 이 시에서 안첼은 '不'와 'ㅈ'의 반복되는 나열을 통해 삼각형과 사각형이 겹쳐 있는 모양을 만들어내는데 이로써 의미 규정의 시선으로부터 미끄러져 나간다.
 
안첼이 그린 세 개의 선(사진)을 참고하면 작가가 지향하는 바를 보다 쉽게 읽어낼 수 있다. 그는 세 귀퉁이에 대각선으로 선을 그려넣고 한 귀퉁이는 대각선으로 자신의 영문 이름을 적어 두었다. 한 귀퉁이는 선 대신 문자가 위치하는 셈인데 이로써 텍스트(문자)와 그래픽(선)의 경계는 간단히 무너진다.
 
옴니버스 형식의 시집이지만 거의 모든 시에는 텍스트와 그래픽의 결합이라는 느슨한 연결고리가 있다. 무키무키만만수의 이민휘가 지은 시의 경우, 두 편 모두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가 그린 세 개의 선은 공교롭게도 모두 서로 만나고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 김바바가 그린 선에서는 두 개가 서로 만나 십(十)자를 그리고 하나의 선은 따로 떨어져 있는데, 이 역시 비밀을 아는 자가 입을 다무는 내용을 담은 그의 시 '비밀로 하기로 한다'와 닮아 있다. 
 
이처럼 세 개의 선과 시를 계기로 삼아 작가들은 서로 연결되고, 더 나아가 독자와 연결된다. 책에도 이미 명시됐듯, 코드프레스라는 이름의 독립출판사가 만든 시집 <세 개의 선>이 최종 목표로 삼는 것은 우리 사이의 연결을 재확인('We reverify being to be linked.')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 개의 선>은 말하자면 사람 사이 연결을 재확인하는 모종의 암호코드인 셈이다.
 
코드프레스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양한 예술가들과 함께 세상과의 흥미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간다는 계획이다. 비정기적으로 일년에 한 권 정도의 책을 발행할 계획인데, 두 번째 책은 아마도 노이즈뮤지션들이 참여하는 시집일 것이라고. 코드프레스의 출판물은 온.오프라인에서는 더 북 소사이어티(www.thebooksociety.org), 유어마인드(www.your-mind.com), 오프라인에서는 가가린, 옥상상점, 이음책방, 샵 메이커즈(blog.naver.com/shopmakers), 커피상점 이심, 컬리 솔(www.curlysol.com)에서 구입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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