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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의료강국의 이면
2015-10-20 11:14:44 2015-10-20 11:21:19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며칠 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TV에 얼굴을 자주 비쳤던 필자의 얼굴을 알아본 그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외국계 회사의 아시아 지사에서 근무한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곧장 우리나라 의료가 너무 좋다는 칭찬을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미국을 비롯해서 20년 넘게 세계 각국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근무를 하고 있는 그는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처럼 값싸고 좋은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없다며, 택시비도 안 되는 진료비를 내고 나올 때면 강한 미안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의 말이 맞다. 우리나라 의료는 싸고 좋기로 소문이 나있다. 얼마 전, 급속히 진행되는 암 진단을 받은 캐나다인이 자국에서 암 치료가 어렵자 한국인 아내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와 치료를 잘 받고 귀국했다는 뉴스가 회자되었고, 필자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그 캐나다인은 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 혜택까지 받는 바람에 경제적으로도 큰 이득을 보았다. 참 맘씨 좋은 나라다. 병도 고쳐주고, 병 치료를 위해 입국한 외국인에게 우리나라 국민이 낸 보험료로 치료비 대부분을 대신 지불해주었으니 얼마나 착하고 좋은 나라인가.
 
값싼 진료비뿐 아니다. 우리나라 의료수준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 심장병과 암치료 분야를 비롯한 대다수의 진료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치료성적은 선진국 못지 않다. 오히려 특정분야에서는 더 앞서는 게 현실이다. 우리에겐 의료강국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그래서 의료관광도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그렇다면 밝은 의료강국의 어두운 이면은 없을까.
 
첫째는 왜곡된 진료 문제다. 얼마 전 정부는 건강보험수가가 원가의 90% 수준임을 인정하고, 이를 점진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했다(실제로는 원가의 70% 수준이다). 지나치게 낮은 건강보험수가 체제에서는 사실상 정상적인 진료는 불가능하다. 병원에서 1분, 3분 진료가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하려다보니 불성실한 진료가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익숙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의료 현실이다. 그뿐 아니다. 원가보전율이 40~80%에 불과한 중환자실, 응급실은 점차 사라지고 있고, 일부 부도덕한 의료기관은 불필요한 진료를 권유하기도 한다.

둘째는 이원화된 의사제도다. 며칠 전, ‘손금으로 질병을 진단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한 한의원이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고발되었으나 보건복지부가 한의학에 부합한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한 일이 발생했다. 의학적 검증도 안 된 손금으로 질병을 진단한다는 것은 세계의학회에 보고될 일이며 국제적 망신이 아닐 수 없는데 정부가 면죄부를 주고 있다. 사이비 의술 수준의 전래 의술을 전통 의료라고 받들며 남겨놓은 결과이며,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 몫이다.
 
셋째, 수만명의 의사 범죄자를 양산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약 10만명의 의사 중 1만명이 넘는 의사들이 범죄자다. 모두 ‘제약사로부터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혐의’로 범법자가 된 사람들이다. 적발된 의사들만 1만여명이지, 과거에는 리베이트가 불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유로운 의사는 몇 되지 않는다. 정부가 리베이트를 없애겠다고 만든 법을 소급적용을 하면서 수만명의 의사들이 범죄자가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의 배달사고는 매우 빈번히 일어나는데, 리베이트의 경우 주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다. 의사들은 의료강국을 만들었지만, 정부는 의료강국 대한민국의 의사들 대다수를 범죄자로 만들었다.
 
진정한 의료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연구와 진료, 교육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지금 대학병원의 교수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연구와 교육을 포기하고 돈벌이에 나서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상업화된 의료현실 앞에 잊혀졌다. 뿐만 아니라 제약발전을 위한 협업은 제약사와의 모든 거래를 불법으로 바라보는 정부의 왜곡된 시선 때문에 크게 위축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나라는 의료강국이 아니라 '의료 꼼수강국'이다. 다만 그것을 국민이 모르고 있고, 정부는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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