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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블랙리스트와 감시사회
2017-01-02 13:56:41 2017-01-02 13:56:41
연말연시 ‘문화계 블랙리스트’ 소식이 우리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언론도 이 문제를 연일 특종으로 다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개입 의혹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전면 부인했다. 관련자로 지목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 공은 특검의 수사로 넘어갔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박 대통령이 김기춘 전 실장에게 지시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계 인사는 총 1만 명. 이 많은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유를 살펴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을 했거나 박원순 서울시장·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 등을 지지했다거나 박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유에서다. 겉으로는 문화융성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이같이 시시콜콜한 이유로 문화·예술인을 처단하려 한 행위는 감시와 처벌을 일삼는 전체주의와 무엇이 다르랴.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원형 건물에 구현된 감시의 원리가 규율 사회의 기본 원리(파놉티시즘)로 사회 전반에 스며들었음을 지적했다. 원래 파놉티콘은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1791년 죄수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해낸 원형감옥이지만 푸코는 이를 ‘전체를 들여다본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푸코의 파놉티콘처럼 현 정부는 시민들을 일일이 들여다보면서 일탈자는 모두 처벌하는 감시의 내면화를 시도했던 것은 아닌가. 만일 사실이라면 망연자실할 일이다.
 
프랑스는 문화융성으로 문화대국을 이룬 나라다. 문화와 예술로 벌어들이는 수입만 해도 연간 578억 유로(한화 73조4169억 원)가 넘는다. 프랑스 국내총생산(GDP) 기준 자동차 산업의 7배가 넘는 수치다. 이 같은 규모로 프랑스의 문화·예술산업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롭게 사고·표현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회문화가 저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무엇보다 비판을 즐기고 논리를 진리보다 상위개념으로 여긴다.
 
프랑스 문화융성에는 훌륭한 정치인들도 큰 역할을 했다. 드골 대통령은 1957년 세계 최초로 프랑스에 문화부를 창설하고 초대 장관에 세계적인 대문호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를 임명했다. <인간의 조건>으로 널리 알려진 말로는 자유를 사랑했으며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 중에서도 특히 박물관, 영화, 음악에 큰 관심을 갖고 프랑스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전도사로 맹활약했다.
 
1981년부터 미테랑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낸 자크 랑(Jack Lang) 역시 조건 없는 자유의 필요성을 역설한 인물이었다. 랑은 프랑스인들에게 자유를 만끽하고 문화를 사랑할 수 있도록 신선한 아이디어로 각종 축제를 고안, 세계적인 행사들을 만들었다. 랑은 지금까지 프랑스 문화의 대부로 불리며 존경받는다.
 
이처럼 문화융성은 비판의식이 살아 꿈틀거리는 다양한 사회문화를 조성·발전시키려는 정치인들의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프랑스의 경우는 이러한 문화융성의 전제조건을 모두 구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떠한가. 문화융성이란 미사여구로 정권을 포장한 채 시민들의 비판을 틀어막고 다양성을 말살하려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문화융성은 어불성설이다. 문화융성을 진정 원했다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측근에게 문화계 수장 자리를 맡겨서도 안 될 일이었다. 프랑스 대통령들처럼 문화에 정통하고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문화 전문인을 장관으로 기용해야 했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북한 문제를 조금만 옹호하면 이른바 ‘종북’으로 몰아 여론몰이를 하는 보수정권이 선량한 문화인을 감시·통제하며 처벌한 행위는 북한의 감시사회와 한 치도 다를 바가 없다. 비판과 이견을 용서하지 않는 ‘똘레랑스 제로’ 정권의 문화융성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결점을 감추기 위한 선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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