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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춤, 세계에 알리는 것이 나의 사명"
(피플 인터뷰)김묘선 전통무용가
국내서 승무 전수조교로 활동…일본 불교 최초의 한국 여성 주지 타이틀도 얻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목표…전통춤이 변질되지 않고 이어지길"
2017-10-12 06:00:00 2017-10-12 16:09:42
[뉴스토마토 임효정 기자] 한국의 춤꾼, 삭발하지 않은 스님, 일본 불교 최초의 한국 여성 주지. 이 모든 타이틀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 한국무용가 김묘선씨다. 김씨는 한국 전통춤의 거목이자 인간문화재로 2015년에 작고한 우봉(宇峰)이매방 선생의 수제자로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조교로 활동 중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조교, 97호 '살풀이 춤' 이수자로서 '대한민국 문화훈장 화관 서훈'과 '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종합대상 대통령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무용계에 많은 업적을 일궈낸 전통무용가로서 걸어온 외롭고 험난한 길이 50년이다.
 
춤꾼 50년, 역경의 연속이었다. 지난 1995년 시코쿠 헨로의 13번째 절인 대일사의 주지스님과 결혼했지만 2007년 뇌경색으로 남편을 잃었다. 아들이 10살 때 일이다. 그는 남편의 길을 이었다. 2년동안 억척같은 노력으로 공부해 주지시험을 통과한 후 주지직을 승계했다. 일본은 대처승이 대부분이며 가족 간 승계도 흔한 일이 아니지만, 외국인 여성이 주지가 된다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배타적이고 위협적이기도 했던 현지인들의 편견을 꿋꿋이 견뎌내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수행한 김묘선은 존경받는 대일사의 주지스님으로 매주 한국 전통춤 승무를 전수하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떤 계기로 춤을 시작하게 됐나
 
농악을 하신 외할아버지 영향이 컸다. 어릴 때부터 육남매가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갔는데, 농악하시는 외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춤을 접하게 됐다. 당시 10살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초등학교 때부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봐주시고 이곳저곳 데리고 돌아다니셨다.
정식으로 입문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부터다. 궁중무용의 대가인 고 김천흥 선생을 첫 스승으로 맞았다. 그는 궁중무용보다 민속무용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매방 선생에게 소개해줬다. 그러면서 이매방 선생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민속무용을 배우게 됐다.
 
-50년간 한 분야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은데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전통춤에 대한 멸시와 천대가 지금까지 더 열심히 춤을 추게 한 원동력이다. 과거에는 춤을 추는 것을 천하게 보는 사람이 많았다. 스승인 이매방 선생도 처음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문화재 지정을 받는 등 인정을 받은 케이스다. 없는 문화를 만드는 나라와 달리 있는 것 조차 잘 살리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전통춤을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계속해서 춤에 빠져들게 한 원동력이 됐다.
 
-50년을 돌아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돌아가신 이매방 스승과 외국을 다니면서 공연했던 시간들이다. 욕을 자주하는 탓에 겉모습은 차갑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속은 참 따뜻한 분이다. 이매방 스승과 함께 했던 것이 지금 돌아보면 나에게 '꽃길'이었다. 스승은 2년 전에 돌아가셨다. 더 많은 추억을 쌓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는 춤을 열심히 가르쳐 주기 보다는 제자들의 끼니를 잘 챙겨주시는 분이다. 만나면 ‘밥은 먹었냐’라는 질문부터 한다. 외국 공연을 가도 항상 쌀과 김치를 싸들고 오셔서 숙소에서 밥을 지어 주셨다.
이매방 스승이 항상 말했다. “나는 이 나이가 되어도 스승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춤을 봐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스승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이다” 스승이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하다.
 
-'춤꾼으로서의 김묘선'과 '승려로서의 김묘선'은 어떤 차이가 있나
 
춤꾼 김묘선은 지극히 개인주의인 인간이다. 거울을 자주 보는 여자였다. 늘 거울을 봤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즉 나만 바라봤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로지 관객들에게 박수 받는 화려한 무대에 선 나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승려가 된 이후로는 달라졌다. 승려 김묘선은 거울이 아닌 창문을 자주 보는 사람이다. 1년에 이곳(대일사)을 찾는 사람은 20만명이다. 여기를 찾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보게 된다. 그들의 아픔도 함께 본다. 승려로서의 김묘선은 더 이상 나만 보지 않는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보는 사람이다.
 
-전통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에 아쉬움이 클 것 같은데 어떤가
 
내 삶은 전부 춤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춤을 세계에 알려서 유네스코에 등재시키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정부도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다. 단순히 돈에 대한 지원이 아니다. 국민들로 하여금 국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서 활성화시키는 길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 국악 프로그램은 주로 심야시간에 방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대학에서 조차도 전통춤이 사라지고 있다. 10여 년전부터 지방 대학을 시작으로 한국무용학과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현재는 수도권에만 관련 과가 남아 있을 뿐이다. 점차 과가 사라지는 데는 전통춤 전공자에 대한 일자리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다. 초, 중, 고등학교 수업과정 가운데 특별활동에서 조차 관련 수업이 없다보니 전공자들의 일자리도 여의치 않다. 전통춤을 어렵게 전공한 이후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는 제자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반면 오히려 외국에서 우리춤에 대해 관심이 크다. 나 역시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 미국에도 4곳의 전수소가 있다. 일본에도 2곳이 있다. 정작 한국에는 수원전수소 1곳 뿐이다. 해외 전수소에서는 한국을 떠난 이민자들도 있지만 외국인도 상당수다. 이들은 열정을 가지고 우리춤을 배운다. 우리춤을 외국에 널리 알린다는 데 보람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외국에서 우리 것을 보존하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다. 전통춤에 비해 상대적으로 창작무용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국내에서는 장소를 대관하는 데도 쉽지 않다. 하루 빨리 전통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으면 좋겠다.
 
-춤 인생 50년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의미가 있으며,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내 삶은 전부 춤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제자를 위해서 남은 인생을 무대에서 보내고 싶다. 내가 무대에 있어야 제자들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춤을 세계에 알려서 유네스코에 등재시키는 것이 목표다.
 
전통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고 싶다. 학생수가 적어지면서 주변에 폐교가 많다. 폐교를 활용해 승무 박물관이나 승무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연령대별로 승무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누구에게나 전통춤이 친숙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단순히 공연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전통춤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묘선 씨가 무대에서 공연하는 장면. 사진제공=이오공감
 
임효정 기자 emy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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