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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살갗 안으로 들어가기
2020-05-21 06:10:11 2020-05-21 11:41:30
무엇보다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지.”
 
미국 작가 하퍼 리의 1960년도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서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1930년대 미국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 책은 인권과 정의, 양심과 용기, 그리고 신념이라는 가치를 한 여자 아이의 시선으로 느끼고, 깨닫고, 바라보고 있다.
 
지난 317일 한 식품 회사 공장의 22세 여성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만 괴롭히라는 유서를 남겼다. 시민단체는 고인은 생전 사내 유언비어와 부서이동 등으로 괴로움을 호소했고 남성 상급자들로부터 성희롱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회사는 제대로 된 사과 없이 자체 조사 결과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연락을 끊는 등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했다. 성희롱 등 직장 괴롭힘이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숨지기 전 휘갈겨 쓴 그녀의 유서에는 초라하다. 내 자신이라는 글귀가 담겨 있다.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을 상대하기엔 너무나도 벅찼던 젊은이의 자괴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시민단체의 주장대로라면 회사는 2차 가해의 의혹도 사고 있다.
 
회사 측 말대로 자체 조사를 했고,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그 과정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도리다. 누구를 상대로 어떤 조사를 벌였는지 소상히 공개하고, 왜 아무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그 근거를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직장 내 갑질이나 성폭력 피해 사례에서 심심치 않게 보아 온 전형적인 패턴이다. 묵살하거나, 축소하거나, 감추거나, 속이거나, 질질 끌다가 종국에는 덮으려는 것. 그럼으로 해서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것.
 
성폭력을 비롯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들은 두렵고 외롭다. 피해를 알렸다는 이유로 또다른 피해를 당하기 일쑤다. 홀로 싸워나가야 할 시간과 비용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어렵사리 싸움을 결심한다 해도 싸우는 과정에서 이들의 마음은 지치고, 병들고, 시들어간다. 약에 의존하며 겨우겨우 버틴다.
 
3, 그러니까 검사나 판사의 판단을 받기 위해 기다려야 할 지난한 시간은 이들의 인생을 갉아먹는다. 설사 천신만고 끝에 법의 구제를 받는다 해도 이들은 피해의 기억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춰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한 것뿐인데 어느 순간 늪에 빠져 버린 것이다.
 
식품 공장의 여성 노동자나 서울 우이동 아파트 경비 노동자의 비극처럼 아예 싸울 엄두도 못 내고 세상을 등지는 경우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다. 이들처럼 고용 불안에 떨며 혹시라도 피해를 고발하면 불이익이 올까 두려워 하는 노동자들은 어디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직장 내 갑질이나 괴롭힘을 피해자 개인의 일로 치부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외로운 피해자들이 더 이상 홀로 싸우지 않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피해자 입장을 헤아려 보는 일에서 시작한다.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 걸어다니는 일.' 경비 노동자의 죽음을 목도했던 국민들의 공분을 생각한다면 50년 전 소설 속 아버지의 말처럼 이 일은 '간단한 요령'이 될 수 있다. 
 
사법기관과 기업도 피해자 입장과 인권을 헤아려야 한다. 그동안 종종 사법기관의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느리고, 관대한 처분은 국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오죽하면 '판결이 성범죄를 키운다'는 말이 나왔을까.
 
기업들도 달라져야 한다. 요즘 사회공헌 활동에 부쩍 신경쓰는 기업들이 늘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직장 내 괴롭힘이 없는 사내 문화를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피해가 발생하면 신속하고 철저하고, 투명하게 대응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사회공헌이다. 그래야 존경받는 기업이 된다. 월급 많이 주고 복지가 좋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다.
 
이승형 산업에디터 sean1202@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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