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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태의 경제편편)금산분리 원칙이 위태롭다
2020-08-05 06:00:00 2020-08-05 06:00:00
재벌의 민원사항이 또하나 해결됐다. 재벌 지주회사가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을 완전자회사 형태로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일반지주회사의 CVC 보유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공정거래법을 연내 개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재벌기업이 벤처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것이다.
 
정부의 계획대로 된다면 내년부터 재벌 지주회사도 창투사 등의 형태로 CVC를 설립할 수 있게 된다. 지주사 밖의 계열사가 보유한 CVC를 지주회사 자회사로 두는 것도 가능해진다.
 
지난 1분기 신규 벤처 투자액은 746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2% 줄었다. 신규 벤처 펀드 결성액은 21.3%나 감소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경제적으로 뚜렷한 성과가 없는 터에 벤처투자마저 줄어들었으니 걱정이 클 줄 안다.
 
벤처투자의 이같은 감소 흐름을 반전시킬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정부는 풍부해진 시중의 유동성이 벤처투자로 흘러가도록 물길을 터준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재벌기업의 풍부한 내부유보금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미 일부 재벌은 CVC를 거느리고 있다. 지주회사가 있는 28개 재벌 집단 중 롯데, CJ, 코오롱, IMM인베스트먼트 등 4곳은 지주체제 밖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다. SK와 LG 등은 해외법인 형태로 CVC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재벌 지주회사가 지배력을 확장하고 악용할 가능성도 크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지난달 재벌에 CVC 보유를 허용하면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나 편법적 경영 승계에 악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진행돼 온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크게 뒤흔들고 재벌의 사금고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한 재벌그룹의 경우 그룹 내 벤처캐피탈(VC)이 승계 지렛대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고 최근 한 매체가 보도하기도 했다.
 
정부는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고 설명한다. 지분을 100% 보유한 완전자회사 형태로만 CVC를 설립할 수 있고, 차입 규모는 벤처지주회사 수준인 자기자본의 200%로 제한된다. 총수 일가가 지분을 가진 회사나 계열회사에는 투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제한조치가 얼마나 실효를 가질 수 있을지 미지수다. 한국의 재벌은 이런 정도의 규제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우회하고 우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금산분리 원칙이 또다시 치명상을 입게 됐다. 문재인정부는 출범 이후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한 지분규제를 푸는 등 금산분리 원칙을 계속 흔들어 왔다. 인터넷전문은행 특별법을 고쳐 카카오뱅크가 카카오의 최대주주로 올라서도록 허용했다. KT는 자회사 BC카드를 내세워 케이뱅크의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KT와 카카오는 삼성그룹이 은행을 소유하던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은행을 지배한 산업자본이 됐다.
 
게다가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보유 문제도 해묵은 과제로 남았다. 현행 보험업법에 따라 보험사가 대주주 및 특수 관계인 관련 회사의 주식과 채권을 자기자본의 60% 또는 전체 자산의 3% 중 적은 금액까지만 보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은행이나 증권과 달리 보험회사는 보유주식의 가치를 취득원가에 의거해 평가한다. 덕분에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48%를 아무 걱정없이 보유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2018년 삼성생명에 자발적 개선을 권고했지만 아직까지 달라진 것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금융위가 보험업 감독규정을 개정하거나 집권여당이 나서서 보험업법을 개정하면 된다. 그렇지만 금융위나 민주당 어느 쪽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지금 간절히 바라는 경제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삼성의 뒷받침이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삼성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국회 정무위에서 금융위원회를 향해 삼성생명의 '황제특혜'를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보긴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소리인 듯하다. 보험업법 개정안이 21대 국회에 다시 제출됐지만, 당분간 처리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지금의 집권여당은 과거 야당시절 산업자본의 인터넷은행 지배를 허용하는 인터넷은행법 개정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러나 집권후 달라졌다. 금산분리 원칙은 갈수록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머지않아 껍데기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차기태 언론인 (foli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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