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수 (사진제공=씨제스엔터테인먼트)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때론 바보같기도 했고, 선하고 멋있기도 했다. 최근 배우 이범수가 연기한 캐릭터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혹은 정상적인 범주 안에 있었다. 그런 이범수가 오랜만에 지독하게 나쁜 악역으로 얼굴을 비췄다.
영화 <신의 한 수>에서 이범수가 맡은 살수는 사람을 죽이고 지배하려 드는 그저 나쁜 놈이다. 딱히 철학도 이유도 없이 나쁜, 게다가 등장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무서운 인물이다.
이범수가 서서히 대중 앞에 나서던 시기 <태양은 없다>나 <짝패>에서의 악역 이후 오랜만에 자극적이고 센 역할이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자신에게 손해가 나는 행동을 하거나 실수를 하면 가차없이 목을 조르거나 칼을 꺼낸다. 섬뜩하다. 이범수가 연기를 해서인지 더 섬뜩하게 보였다.
"평소에는 촬영장에서 웃고 떠들고 노는데, 이번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살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 지점이 영화에 보인 것 같아 개인적으로 만족한다"고 미소를 짓는 이범수를 지난 1일 서울 신사동 소재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내기 바둑판에 뛰어든 남자들의 복수와 욕망을 그린 <신의 한 수>는 대작 외화 <트랜스포머:사라진 시대>와 맞붙는다. 영화 관계자 스스로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할 정도로 과감한 결정이다.
이에 대해 이범수는 "어차피 한국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안 센 작품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세지 않은 작품만 영화관에 걸릴 때는 관객이 얼마 있지도 않은 비수기나 암흑기 때다. 그건 그거대로 아쉽다. 배우는 그런걸 예견할 수 없다. 그저 더더욱 값지고 때깔 좋게 만들면 된다"고 웃어보였다.
이 말을 할 때에는 <신의 한 수>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이범수 (사진제공=씨제스엔터테인먼트)
◇"자극적인 캐릭터 하고 싶었어"
이범수가 이번 영화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만한 이유는 많다. 오락영화로서 재미가 풍부하고, 바둑이라는 소재 자체가 신선하다. 정우성과 이범수 외에 안성기, 김인권, 이시영, 최진혁, 안길강 등 연기파 배우들이 제 힘을 발휘했다.
포스터도 예고편도 꽤 잘나왔다는 평가다. 외화가 강세라는 올해 영화 시장에서 성수기 포문을 여는 영화가 <신의 한 수>라서 배급사인 쇼박스 미디어플렉스 뿐 아니라 타 배급사도 관심이 높다.
그런 <신의 한 수>에서 이범수가 맡은 살수는 내기 바둑판 조직의 보스다. 대사도 거의 없다. 감정 표현도 없다. 굳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있다면 분노 정도다. 표정과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인물이다. 살수가 등장하면 뒷골이 서늘해진다.
살수를 보고 무서움을 느꼈다고 하니 고맙다고 한다.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단다.
이범수는 "살수는 말도 안하고 그저 상대 눈을 응시한다. 이번에는 액션보다는 리액션이 많았다. 상대의 행동에 반응하는 연기를 주로 했던 것 같다. 살수는 늘 상대를 능멸하려고 하고, 누군가와 거래를 할 때 그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덤빌 거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대사도 없고 표현도 적다. 그래서 전신문신이라는 설정을 가미했다. 아울러 노출도 감행한다. 샤워를 하던 중 배꼽(이시영 분)이 도발적인 말을 하자 옷을 벗은 채로 뚜벅뚜벅 걸어가 목을 움켜쥔다. 임팩트 있는 장면이다.
이렇듯 살수는 색이 굉장히 진하다. MSG를 듬뿍 부은 듯한 캐릭터. 이범수는 왜 살수를 선택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왜 이 역할이었었냐"고 큰 뜻 없이 쉽게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예상보다 길었다.
이범수는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아니다. 멜로 배우라고 해서 그쪽을 향해 세팅해가는 이범수가 아니다. 코믹배우도 아니다. 내 발자취는 그런 틀에 매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달려가고 있다. 거창한 말을 떠나서 역할을 맡는다는 건 하나의 놀이라고 생각한다. 그 즐거움을 느끼고자 하는 게 배우를 하는 여러 이유중 하나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는 악역을 맡아서 놀고 싶었다. 근래 맡았던 역할들의 캐릭터가 착하다보니 다소 평범했다. 희노애락이 풍부한 캐릭터를 즐기는데 최근에는 밋밋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아주 자극적인 캐릭터를 하고 싶었던 터에 살수가 걸려들었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인물군을 체험한 이범수다. 이번에는 안성기가 맡은 주님 역할에 탐이 난다고 했다. "안성기 선배님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고 생각한다. 맹인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거에 감동을 받았다"는 그는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교과서적이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배우는 캐릭터가 끌려야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범수 (사진제공=씨제스엔터테인먼트)
◇"배우로서는 하수이고 싶지 않다"
바둑을 소재로 둔 영화라 그런지 명대사가 많다. 특히 "인생은 고수에게는 놀이터고, 하수에게는 생지옥이지"라는 말은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고수일까 하수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 정도였다.
당연히 이 질문이 이범수에게도 돌아갔다.
"이 질문을 몇 번 받았는데, 고수나 하수라고 말하기 민망하다"고 말한 이범수는 "난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매 작품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이다. 다신 연기를 못한다고 하더라도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대답이 시원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질문에 대해 얘기를 더 듣고 싶었다. 기자의 표정에서 시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범수가 읽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대학교 1학년 때 구둣방 할아버지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꺼내놨다.
"대학교 1학년 때다. 경기도 안성이 학교라서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그 터미널 앞에 구둣방이 있었다. 행색이 남루한 할아버지였는데, 구두를 닦으시면서 구두약은 캥거루 표가 좋고, 굽을 돌리는 기계는 독일제가 좋다고 말씀을 하셨다. 정말 깨끗하게 열심히 닦으셨다. 구둣방을 나오면서 느낀 점이 그분이 무척 프로페셔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해 보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 소신과 자부심이 있어보였다. 투철한 직업관도 엿보였다. 그분을 보고 고수일까 하수일까 고민해본다면 그는 고수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내게 질문을 한다면 나는 하수이고 싶지 않다. 배우 생활만큼은 고수로서 보내고 싶다."
약 2분 가까이 옛 추억과 함께 꺼낸 이범수의 말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이미 연기적인 면에서 대단한 실력을 과시했음에도 자신을 낮추는 태도와 함께 뛰어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느껴졌다.
"이미 보여준게 정말 많지 않냐. 이미 이범수는 엄청난 배우라고 대중들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범수는 부끄럽다는 듯 "정말 그럴까요.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 더 열심히 해야죠"라고 겸손함을 드러냈다.
큰 웃음이 넘쳤던 인터뷰는 아니었지만, 진중함과 진정성이 있어서였는지 꽤나 즐거웠다. 이범수도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갑작스레 그는 "이번에 500만 넘으면 기자들에게 한 턱 쏘겠다"고 선언했다. "500만이 조금 못 미치더라도 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범수에게 말은 못했지만 <신의 한 수>가 500만이 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꼭 그가 사주는 밥을 먹고 싶어서는 아니다. 오랜만에 나온 완성도 있는 영화이기에, 또 진정성이 넘쳤던 이범수와 다시 한 번 담소를 나누고 싶기에 그런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