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의 거리> 포스터 (사진제공=JTBC)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요즘 <유나의 거리>를 봅니다. (시)청률이가 하늘을 찔러도 황당한 얘기는 안보게 되고 음모 술수 잔꾀는 불쾌해서 못 보는 괴팍한 사람이라, 멈추고 볼만한, 기다려서 보는 드라마를 그리 자주 만나지는 못합니다. 그이(김운경 작가)에게 많이 고마워 동업자인 것이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국내 최고의 필력'이라는 평가를 받는 김수현 작가가 JTBC <유나의 거리>에 대해 남긴 말이다. 배우 김옥빈과 이희준을 내세운 이 드라마는 방영 초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방영 2개월째에 접어든 지금 월요일과 화요일은 "<유나의 거리> 하는 날"로 불린다. 각종 게시판은 <유나의 거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재벌은 물론이고 이른바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도 없고,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유나의 거리>. 뚜렷한 톱스타도 없고, 자극적인 요소도 없는 이 드라마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를 짚어봤다.
◇김옥빈-이희준 (사진제공=JTBC)
◇소설을 읽는 듯한 잔잔한 흐름
최근 드라마의 트렌드는 속도감이 키워드다. 사건과 사건이 빠르게 이어져야 시청자들의 관심을 산다. 하지만 50부작 <유나의 거리>는 이와 반대다.
화려한 직업을 가진 이도 없다. 주인공은 건실하지만 공사판을 전전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창만(이희준 분)이다. 타이틀롤 유나는 전과 3범의 소매치기다. 그 기술이 다소 뛰어날 뿐이다. 둘 다 우리네 옆집에 살 법한 사람들이다.
서울의 작은 다세대 주택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에는 각자 파란만장한 삶을 떠돌다 어찌 어찌 흘러들어온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 머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현실에서 보면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스펙의 평범한 창만이 이 공간에서는 빛난다. 소매치기로 전전하는 유나(김옥빈 분), 꽃뱀으로 살아가는 유나의 동거인(서유정 분), 전국구 건달이었지만 이제는 기초생활수급자 신세로 옛 부하 한만복(이문식 분)에 얹혀사는 장노인(정종준 분), 개장수로 살아가는 한만복의 처남 홍계팔(조희봉 분), 돈 밝히는 형사였다가 현재는 노래방을 운영하는 봉달호(안내상 분)와 그의 아내 박양순(오나라 분) 등 하나 같이 현실에서 소외된 인물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유나의 거리>는 현실에서 볼 법한 사람들을 통해 희망을 전한다. 낮은 위치에서 살아가는 인물들과의 어우러짐을 통해 평범한 삶을 살길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꿈을 전파한다. 소시민들의 멜로는 '평범함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빠르지 않게 잔잔히 흘러가는 <유나의 거리>는 흥미진진한 왕자나 공주가 없이 우리네 이야기를 따뜻하고 공감가게 꾸며내고 있다. 서울의 달동네를 배경으로 한 <서울의 달>(1994)을 통해 서울사람들의 애환을 그려냈던 김운경 작가는 20년이 지나 2014년판 <서울의 달>을 만들고 있다.
◇<유나의 거리> 포스터 (사진제공=JTBC)
◇김옥빈과 이희준..연극판 내공으로 무장한 배우들
어딘지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김옥빈.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에 출연했을 때만해도 승승장구가 예상됐다. 하지만 이후 행보는 아쉬웠다. <고지전>(2011) 외에 성공했다고 할만한 작품이 없다. 특히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결과가 아쉬웠다. "이상하게 안 되는 배우"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유나의 거리>에서 김옥빈은 털털하고 중성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유나를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다. 딱히 흠 잡을 데 없는 감성 연기 속에 언뜻언뜻 발산되는 여성적 매력도 갖추고 있다. 유나를 흠모하는 창만과 남수(강신효 분)의 심정이 이해된다.
김옥빈은 이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쌓았던 내공이 자신의 옷처럼 딱 맞는 캐릭터를 만난 뒤 훨훨 날아오르는 형태다.
창만을 연기하는 이희준은 생활 연기의 1인자로 불렸다. 편안하게 마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듯한 힘을 뺀 연기는 <유나의 거리>의 창만을 더욱 빛내고 있다. 발성과 감정 연기 역시 뛰어나고, 착한 외형 속에서 틈틈히 드러나는 카리스마는 창만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이들 뿐이 아니다. 연극판에서 내공을 쌓은 연기파 배우들이 뒤를 바치고 있다.
"지금은 장동건이지만 옛날에는 남궁원이었다. 길거리만 나가면 나보고 '남궁원 닮았다'고 했다"고 허세를 부리는 장노인 역의 정종준을 비롯해 딸과 자존심 싸움을 벌이지만, 낭만건달 장노인을 모시는 의리도 있는 한만복 역의 이문식, 어떤 역할이든 그 색깔을 구현하는 안내상, 얼굴만 봐도 연민이 느껴지는 조희봉까지 <유나의 거리>에는 훌륭한 배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내고 있다.
아울러 서유정과 김희정, 신소율, 강신효, 김영웅 등의 배우들도 자신의 역할을 맛깔나게 담당하고 있다. "이 인물은 안 봤으면 좋겠다"고 할 만한 캐릭터가 없이 어떤 역할이든 정이 가는 연기를 펼친다.
주조연 가릴 것 없이 최고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 <유나의 거리>는 웰메이드 드라마로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