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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평화의 아이콘' 꿈꾸는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
입력 : 2014-07-22 오전 8:37:49
◇김철웅 피아니스트 (사진제공=보령기획)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개인적으로 북한에서 생활한 사람을 처음 만나 본다. 만나러 가는 길이 설렜다. 그저 상상만해도 흥미진진하고 즐거울 것 같았다. 그렇게 지난 18일 피아니스트 김철웅을 만나러 갔다.
 
보자마자 악수를 건네는 모습에서 '한국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가 고장이 나서 고치고 오는 길이었다"며 인사를 건네는데 외모는 물론이고 말투도 전혀 북한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한국에 온지 12년차인 그는 남한 혹은 한국이라는 말대신 '우리나라'라는 표현을 썼다.
 
북의 도지사급 아버지와 김영직 사범대학에서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다. "북한은 블랙홀이야.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싹 다 말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모습부터 흥미가 생겼다.
 
북에서 음악을 배워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국립대학교의 유학생활을 거쳐 국내 백제대학교에서 교수로서 생활 중인 그는 오는 23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2014 평화콘서트>를 준비 중이다. "남과 북은 다름에 대해서는 잘 안다. 이제는 '같음'에 대해 얘기해야 되는 시기"라며 음악을 통해 하나를 만들고자 하는 그가 살아온 삶을 따라가보자.
 
◇"치맛바람으로 시작한 음악..엄청난 혜택을 누렸다"
 
"만민은 평등하다"는 공산주의에서 출발한 북한이지만 그 어느 국가보다도 '계급이 중요한 사회'가 북한이다. A급 출신성분부터 F까지 서열을 나눌 수 있는 나라가 북한이다. 김철웅 피아니스트는 A중에서도 특A에 꼽히는 출신성분을 갖고 있었다.
 
"A와 F의 삶의 차이는 국내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과 일반 서민들의 차이보다 훨씬 크죠. F의 삶은 말할 것도 없어요. 아프리카예요."
 
그의 아버지는 김일성과 같이 전쟁을 치뤘고, 국내로 치면 도지사급 노동당 간부다. 어머니는 명문대학교 국문과 교수고 할머니는 평양제1백화점의 사장이다. "엄청나게 대단한 집안이다"고 말하니 "나는 별 거 아니다. 나랑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 중에 장성택의 조카(여)가 있었다"고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는 특A급의 출신성분을 가진 사람이 맞았다.
 
포털에 알려진 것과 달리 그는 1974년 생이다. 6살 때부터 유치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일종에 치맛바람이라고 할 수 있지. 어머니가 봤을 때 재능도 있고, 음악을 하면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어보였고, 당시 내가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했을 때가 1981년이었어요. 그 때가 김정일이 세력을 구축하면서 문화융성을 하는 분위기가 일어났어요. 그래서 음악하면 괜찮겠다고 싶으셨던 거 같아요."
 
김일성 대학에도 음대가 없다. 음악학교는 오롯이 평양음악무용대학에만 있다. 김씨는 8살의 나이에 파격적인 경쟁을 한다. '670:1'의 경쟁이다.
 
그는 "5000명이 지원을 했는데 9명을 뽑았어요. 그 때 뽑힌 거죠. 북한이라는 나라는 선택을 못 받으면 꿈을 이룰 수 없는 곳이에요. 우리나라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잖아요. 그게 성공하냐 못하냐는 능력의 차이지. 할 수는 있잖아요. 그런데 북한은 그게 아니에요. 국가가 개인을 선택하는 시스템이죠. 학비까지 국가가 내주는데, 밑지는 장사를 하면 안되잖아요. 인재양성을 확실히 하죠. 될 만한 애들만 뽑고"라고 말했다.
 
그렇게 음대에 어린 나이에 입학했다. 일반 교과과정은 그 나이대에 맞춘 커리큘럼을 짜지만, 전공수업은 대학교수들이 직접 가르친다. "이게 유럽식 교육방식인데 저는 음악 분야는 이게 맞다고 봐요. 왜냐하면 피아노는 아무나한테 배우면 안돼요. 근데 우리나라는 아무나한테 배우잖아요. 기초가 달라요. 기초가 튼튼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이 많아도 피아니스트가 많이 배출되지 않아요."
 
그렇게 22세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특혜도 어마어마했다. 그는 군대를 가지 않았다. 모내기철과 가을철에 밥을 먹는 사람이라면 꼭 나가야하는 농촌지원도 나가지 않아도 됐다. 큰 건물을 지을 때도 그는 차출되지 않았다. 기악을 하기 때문에 손이 망가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도 다 나가요. 성악가나 작곡가도 노역을 하죠. 근데 기악하는 사람이 손이 망가지는 건 국가입장에서도 손해인거야. 그러니까 안 내보내는 거죠. 그게 면제이유죠."
 
재밌는 점은 이러한 특혜는 철저히 출신성분이 좋지 않으면 누릴 수 없다는 데 있다. 북한에서 출신성분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재능이 있어도 출신성분이 D~F면 음악을 못해요. 음악을 하면 외국에 유학을 보내야 하는데, 북한에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출신성분이 인정되는 사람들이어야 해요. '이들은 우리편이다'라는 사람들만 비행기를 태우죠. 적대계급이라고 있어요. 기득권층을 반대하는 계급. E~F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평생 승진이 안 되는 사람들이에요. 노비랑 뭐가 달라. 어마어마한 계급사회죠."
 
◇김철웅 피아니스트 (사진제공=보령기획)
 
◇"장성택 조카와 연애..청혼하려다 탈북 결심"
 
군대도 가지 않은 그는 22세의 빠른 나이에 대학에 졸업한다. 초등학교 과정이 4년이기 때문에 군대를 가지 않는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2년이 더 빠른 셈이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 비행기를 탔다.
 
고위층 자제라 북한에서의 삶은 자유로웠다.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혜택을 많이 누렸다. 부모의 힘이 워낙 막강한지라 남한의 사람들과 다를 게 없었다. 집에 있는 차도 벤츠였다.
 
"벤츠의 VIP 고객은 북한"이라고 말한 김씨는 "차를 생산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외제차를 많이 끈다. 우리집도 벤츠였다. 계급의 힘은 차 번호판에서 나뉜다. 가장 강한 번호가 '216'이다. 김정일의 생일이다. 차 번호판이 216으로 시작하는 차는 북한에서 30명 정도 밖에 없다. 랭킹 30위 안에 든다는 말이다. 우리집이 그랬다"고 웃어보였다.
 
특A라 불릴 만하다. 그래서 러시아에 갔어도 자유로움에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확실히 편하기는 했는데, 북한이 나쁘다라는 생각을 당시에는 못했죠."
 
오히려 애국심이 생겼다. 한국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한국의 대중가요나 애국가를 들으면 겸허해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 나라에 갔는데 북한이 나쁘다는 거야.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래서 애국심이 많이 생겼죠. 러시아에서의 생활은 내게 탈북을 할 생각을 주지 않았어요."
 
4년의 교육을 받은 뒤 그는 북한으로 다시 돌아갔다. 가서보니 답답했다는 것이다. 생활에서의 차이는 없었는데, '피아노를 치는 기계'의 느낌을 받은 것이 컸다.
 
김씨는 "북으로 돌아가서 답답했던게 그들이 원하는 레파토리만 치게 하는 거예요. 수준은 굉장히 높아요. 그런데 답답하지. 외국의 좋은 곡들이 많은데 맨날 정치적인 음악만 치게 하니까. '피아노 치는 기계'가 되는 것 같더라고. 많이 답답했어요. 그러다 사건이 하나 터졌죠"라고 설명했다.
 
그 사건은 장성택의 조카와 연관이 된다. 러시아 유학생활을 마치고 온 뒤 동창회에 참석했다. 예전에는 여자로 보이지 않았던 장씨가 갑자기 여자로 보였다는 것이다. 동창회에서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둘은 저녁을 먹었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 당시 나이가 28살이었다.
 
"슬슬 나도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장성택의 조카면 뭐 나한테도 나쁠 게 없었지. 어차피 배운게 피아노이니 피아노를 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친곡이 리차드 클라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었어요. 프랑스 팝인데 그 곡이 북한에서는 금지곡이에요. 그걸 연습하다가 누가 위에 찌른거야. 그래서 시말서를 썼어요. 그때 소위 말하면 빡이 돌았어. 피아노를 평생 배운 내가 딴 걸 친 것도 아니고 피아노를 쳤는데 이런 대우를 한다는 게 열받았죠. '이 나라의 금지곡의 기준이 뭐냐'는 반감이 생겼죠. 그 때 탈북을 결심했어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죠. 부모님에게도 비밀로 했으니. 3일 제대로 고민하고 북을 넘었죠. 강을 감시하는 군인들에게 돈을 주고 도강을 했어요. 그게 2001년이었어요. 조선족 마을로 갔죠."
 
북한이지만 그 안에서 최고의 귀족이었다. 힘든 일을 거의 겪지 않고 편하게 컸다. 심지어 군대도 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조선족 마을에서의 삶은 일생일대의 큰 시련이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하고 목재소에서 일도 하고, 정말 힘들게 살았죠. 신분증도 없었어요. 합법으로 온 게 아니니까. 내가 북한사람인 걸 들키면 바로 북한으로 이송되게 돼있어요. 그럼 나는 죽는거지. 그냥 죽는 거예요. 목숨을 건거죠."
 
약 4개월간의 고생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교회에 가서 피아노를 치게 됐고, 그 때부터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그리고 한국선교사들을 알게 됐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두 번이나 북한으로 이송되게 된다.
 
김씨는 "여권을 위조했는데, 그게 걸린 거에요. 북한 공안에게 잡혀서 고문도 당했죠. 그래서 북으로 이송되는 열차에서 뛰어내려가지고 한 번 도망쳤어요. 다시 조선족 마을로 갔고, 이번에는 몽골 대사관을 통해서 가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잡혀서 다시 북한으로 끌려갔어요. 그런데 그 때 만난 사람이 우리 아버지 후배였던거야. 날 풀어주더라고요. 집에 가라고. 그 길로 다시 도강했어요. 돌아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고, 평양에서 함경도까지 가는데 5일 걸려요. 전기가 없어서 기차가 가다가 서. 언제 또 여기 오게 될지 몰랐던거죠."
 
세 번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 때는 진짜. 어휴"라는 그의 얼굴에서 당시의 아찔함이 전달됐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하단다. 트라우마가 많이 남아보였다.
 
◇"평화를 말하는 <평화콘서트>"
 
한국에 온 그는 난감했다. 아직까지 탈북자들을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과 약 3700만원의 돈을 받았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첫 집은 충청북도 청주였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었던지라 청주에서 딱히 일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당시에 신변보안 담당이라고 해서 탈북자들을 감시하는 경찰이 있었고, 그 경찰이 돈을 관리해줬어요. 왜냐하면 사기당할 수도 있는 거거든. 그런데 그 경찰이 나를 딱 보고 청주에 있을 사람 같지 않으니까 돈을 주더라고요. 알아서 살라고."
 
그래서 서울에 왔다. 탈북자들과 연결돼 그들의 집에서 얹혀살았다. 처음에는 피아노 학원에서 강사를 했고, 서울 화곡동의 라이브 바에서 피아노를 쳤다. 북한 예술단을 만들기도 했다. "레파토리부터 다 내가 만들었지. 공연을 다닐 수 있도록. 그 때 내가 나쁜 걸 가르친 게 립싱크였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약장수랑 붙어먹더라고. 공연 보여주다가 중간에 노인들 상대로 약 팔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손 닦았죠."
 
또 다시 교회에 연이 닿았다. 입소문이 났고, 한세대학교에서 강의를 제의받았다. "어차피 피아노는 다 똑같으니까."
 
그러면서 네트워크가 넓어졌고, 독특한 스토리를 갖고 있어서 인권과 관련한 공연을 많이 했다. 미국 국무부와 연이 닿아 카네기홀에서 연주를 했고, UN에서도 초청을 받았다. 이 외의 각국을 돌며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향한 의미있는 공연을 주로 했다. "정말 살기 위해 열심히 살았죠."
 
좀 위험하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탈북자가 북한 인권에 대해 말하고 다니는 것이 암살에 대한 위험을 높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궁금증을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정치적이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고 봐요. 북한에서 음악을 배웠지만 정치적인 영역은 아니잖아요. 누구의 암살이나 테러대상은 아니라고봐요.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위협은 못 느껴요. 또 북한 입장에서 봐도 나를 굳이 다치게 해서 국가의 이미지만 망칠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걸 알기 때문에 편하게 생각해요."
 
또 그는 말을 이었다. 인권은 정치를 빼야한다면서 말을 덧붙였다.
 
"인권이라는 것은 정치와 분리돼야 해요. 내가 경험한 이야기들과 음악을 첨부해서 말하는 거거든요. 내가 말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도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멀리 하는 거거든요. 그게 아니라 그들도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다만 경제가 약해서 못 먹을 뿐이죠. 다 똑같은 경제와 생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다름'은 알만큼 알았으니 '같음'을 얘기해야 되는 시기라고 말하는 그다. 북한은 한류드라마가 유입돼서 이미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하지만 한국은 북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나름 북한 음악의 아이콘이라 생각하는데,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어요. 그만큼 이 나라가 북한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젠 관심을 가져야 해요. 북한에 대해서. 일본보고 섬나라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섬나라 아니냐고. 인천공항 없으면 어떻게 외국을 나가요. 후세라도 통일을 하려면 지금부터 노력을 해야 돼요."
 
그 노력의 시작이 <평화콘서트>다. 지난해 처음으로 시작해 올해가 두 번째다. 7월 27일을 목표로 했는데, 예술의 전당의 대관 일정으로 인해 23일에 개최한다. 7월 27일은 6.25 정전협정이 있었던 날이다. 이를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싶다는 게 그의 말이다.
 
"남북 가곡의 밤이라는 의미라 국내 최초로 남한의 가곡과 북한의 가곡을 불러요. 남한 곡 하나 놓고 북한 곡 하나를 놨어요. 이 의미가 뭐냐면 '다름'이 아니라 '같음'을 얘기하고 싶다는 거죠. 가곡은 다르지 않거든요.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게 탈북청소년 오케스트라예요. 이건 순수탈북자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어린 친구들끼리는 '통일이 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싶어요. 목표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나서는 거예요. '평화의 아이콘'으로. 아이들은 이미 통일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 오케스트라를 만들기 위한 기금 마련 콘서트가 <평화콘서트>죠."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신다"고 하니 "그래. 나 대단한 일 하고 있어요. 잘 좀 부탁해요"라며 껄껄 웃는 그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부탁했다. "탈북자라고 하는데, 탈북을 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정체성은 한국 사람이에요. 다른 눈으로 우리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안했다. 아직 평화라는 것에 대해 몸에서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의 아이콘을 자처한 김철웅 피아니스트. 목숨을 걸고 나온 그다. 그의 꿈이 훨훨 날 수있도록 기원한다.
 
함상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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