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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주거독립사)①문화주택단지
입력 : 2015-06-12 오후 12:00:00
토마토 미디어그룹에서는 광복 70주년에 기해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인 주거독립사'를 준비중이다. 11월 방영 예정이며 3부작으로 기획된 본 다큐멘터리는 일본 강점기 이전과 이후달라진 우리의 주거공간을 살펴본다. 탈 아파트 바람이 부는 2015년,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주거공간 선택권은 어떤 것이 있는가? 그 다양성을 고찰하며 동시에 해외의 사례를 들어 미래의 주거공간을 점쳐보고자 함이 본 다큐멘터리의 기획의도다. 강점기에 도입된 최초의 아파트부터 일식과 서양식이 혼재하는 문화가옥, 한국에 남아있는 적산가옥 등 다큐멘터리 현장에서 만난 주거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그 첫 번째 이야기는 바로 박정희 문화가옥이다.(편집자)
 
“원래 우리 형님이 관리를 하셨는데,지금은 내가 관리합니다.”
 
박정희 문화가옥을 관리하고 있는 박운영씨. 사진/알토마토
이 정도 자격이면 사진 한 장 찍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박운영씨는 말했다. 50년 세월을 이 집과 함께 살아왔다.그는 가장 극적인 순간 이후 지금까지 이 집을 목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부엌이 기념관으로 바뀌고, 출입구가 변경되었으며, 현관문이 바뀌었다. 없던 창고가 증설되었나 하면 다락 형태이던 자녀방도 그 모습이 바뀌었다.
 
하지만 박 씨도 모른다. 원래 이 집은 누구를 위한 어떤 집이었는지. 원래의 형태와 다른 내부. 꽤나 많은 변형이 가해졌음에도 이 주택에는 주거사적 의미가 있다. 일본 강점기에 장충동과 신당동 일대에 들어섰던 ‘문화주택’단지 중 유일하게 남은 집이기 때문이다.
 
해설사 김천수씨(왼쪽)가 방문객들에게 가옥을 안내하고 있다. 사진/알토마토
평일 점심시간에도 방문객의 발걸음은 이어졌다.
 
“복원이 제대로 된 게 맞습니까?” 이 집에 거주했던 이들에 대한 질문 외에도 집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꼼꼼하게 집을 살피는 이들을 피해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선풍기, 의자, 심지어 달력까지 모두 당시의 시간에 멈춰있는 듯 했다(이 중 어떤 것도 실제 거주 당시 사용된 것은 없다.)
 
손때 묻은 생활의 흔적을 기대하고 온 방문객이라면 조금은 실망할 수 있는 포인트다. 그러나 거주자에 초점을 두지 않고 주거양식 변화기의 남은 유물로 본다면, 박정희 가옥은 집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달력에서 등을 돌리면 일본가옥에서 볼 수 있는 신전이 보인다. 현재는 안내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속복도라고 불리는 좁은 복도가 방과 방 사이를 가로지는 집. 확실히 이 집은 한국 전통 주거공간과는 많이 ‘다르다’
 
신전이 있던 자리. 사진/알토마토
문화주택의 거주자의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온 일본인 기업가들과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학생들이었다. 문화주택이라는 이름은 1922년 평화기념 동경박람회의 ‘문화촌’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같은 시기에 분양되었던 북촌 한옥과 그 규모를 비교해볼 때 문화주택은 세 배가량 크다. 이쯤이면 자연스럽게 당시 거주자들의 경제력도 연상해볼 수 있다. 중상류층의 상징이 곧 문화주택이었다. 이곳에 살 수 있는 사람은 일본 기업가,경성제국대학의 교수,체신국장 등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지가 평당 30원, 100평의 토지에 30평의 집을 지으면 6000원으로 금화장의 일원이 된다는 이야기다.” – 송인호 [도시형한옥의 유형 연구, 1990] 중
 
장충동과 신당동 일대에 대거 포진했던 문화주택 단지. 1921년, 1934년과 1938년 세 차례 분양된 문화주택은 당시 수도와 난방 등 근대적인 시설을 갖춰 누구나 선망하는 집이었다. 이러한 문화주택의 과거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개발 이전, 장충동과 신당동 일대는 빈민촌과 화장터가 있던 자리다.(어느 시대나 밀어내는 사람과 밀려나는 이의 공식은 유사하다.) 격자로 구획된 도로와 규격을 갖춰 지어진 신식 주택단지. 이렇게 개발을 거쳐 과거를 깨끗하게 씻어낸 문화주택은 당시 이상의 소설 '종생기'에 등장하듯, 경제적 평민들이 소망하는 주거공간이 되었다. 당시 경성일보에서는 장충동 문화주택단지에서 화장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
 
“..장충단의 옆부터 동으로 꺾어 넓은 새 도로,왕십리로 가는 전차도로부터 우측으로 꺾어 장충단 안쪽에 나오는 12간 도로,. 즉 島德도로는 멋지게 완성되었다.게다가 이 도로에 접속하여 약 5천 평은 整地가 되었고,화장장의 흔적도 몰라볼 정도로 멋진 주택지의 바탕이 되었다.”
 
사라진 장독대, 더해진 식모방. 사진/알토마토
장독대가 볕 좋은 곳에 자리잡고, 화장실은 외부에 위치했던 과거의 주택. 한국 전통 주거양식은 안과 밖의 경계가 없었다. 그러나 문화주택에서는 외부 화장실을 찾아볼 수 없다. 화장실은 안으로 들어왔고, 식모방이 생겨났으며 부엌 역시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여의도 일부 아파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실내 식모방이 아닌, 실외 식모방.)
 
박정희 가옥에도 외부의 식모방을 찾아볼 수 있다. 부엌이 있던 자리는 확장 공사를 거쳐 영상실로 사용되고 있다. 무릎이 아픈 장모를 위해 입식 부엌으로 개조되었다던 부엌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장독대는 별도로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장을 먹고 사는 민족이다보니 볕 좋은 곳에 방황하던 장독을 세워두었다. 그 외에도 일식 벽장이 방마다 남아있다. 한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큰 창도 눈에 띈다.
 
이 시기, 문화라는 단어는 ‘재래’라는 단어의 대치선상에서 새롭고 좋은 것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문화 주택 역시 정형화 된 어떤 형태라기 보다는 서구식,일본식의 새로운 주택 양식이 혼재하는 양상을 보인다. 문화주택을 선망하게 된 이유는 단지 그 집이 새롭고 편해서만은 아니었다. 신문에서, 소설에서 연일 생활양식의 개량을 외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좋은 것이며 더 나은 것이라는 선전은 지금의 아파트 광고에서도 익숙한 풍경이다.그렇게 문화주택은 한동안 고급주거공간으로 군림하게 된다.
 
신당동의 박정희 가옥. 사진/알토마토
북촌 한옥, 문화주택, 그리고 최초의 아파트. 모두 같은 시대에 한국에 발을 들인 주거공간이다.
 
주택의 대량생산과 더불어 북촌 집장사들, 문화주택단지 사이에서 시작된 분양은 집에 상품의 가치를 더한다. 짓고 파는 것, 획일화된 공간에 다양한 거주자들이 스스로를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 그 결과 우리는 상품이 된 집을 사고팔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도심 천지가 빌라와 아파트촌이 되고, 탁 트인 수평선을 찾기 어려운 한국. 왜 우리는 이다지도 협소한 주거선택권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만 하지 않은가? 탈 아파트와 소형 전원주택에 대한 수요가 높아진 지금이 한국인 주거독립의 시작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한국인 주거독립사는 이 의문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발점인 일본 강점기로부터 지금까지, 시대별로 명멸한 주거공간들을 하나씩 역사 밖으로 끄집어내 관찰해볼 것이다.
 
이도화 알토마토 PD
 
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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