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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주거독립사)②보성 이금재 고택
입력 : 2015-06-21 오전 10:45:04
토마토 미디어그룹에서는 광복 70주년에 기해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인 주거독립사'를 준비중이다. 11월 방영 예정이며 3부작으로 기획된 본 다큐멘터리는 일본 강점기 이전과 이후달라진 우리의 주거공간을 살펴본다.아파트부터 주택까지 맞춤형 공간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늘어나는 지금.한옥이 맞춤형 주택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그 중에서도 여성을 위해 설계된 고택,보성 강골마을의 이금재 고택을 두 번째로 만나본다.(편집자)
 
"이게 규모는 작아도 경복궁의 후원을 본딴 거예요.”
 
이금재 고택을 지키는 종손 이강재 선생. 사진/알토마토
정면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집은 아기자기한 맛이 가득했다. 이강재 선생은 후원 조각마루에 앉아 며느리 방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목감나무로 마루를 꾸며진 며느리 방은 집 정면에서 바로 진입할 수 없는 구조다. 대청마루를 지나방 하나를 넘어 가거나 주방 문을 통과해 장독대를 거쳐야 다다를 수 있는 곳. 이 집은 여자를 위한 집이라고 집주인은 말한다. 보성 강골마을. 이곳에서는 한옥이라는 한 이름 아래 다양한 맞춤형 한옥들을 만나볼 수 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금재 고택과 이용욱 고택은 바로 그 좋은 예다. 여성들을 위한 맞춤형 공간이 판치는 지금, 조선 시대의 여성 맞춤형 공간이 또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금재 고택이다.
 
이금재가의 여성들. 사진/알토마토
 
 
◇고조할머니를 위한 집
 
일본 강점기에 사진을 인화하기 위한 암실까지 갖췄던 집. 이 집은 당시 지주의 경제능력과 센스도 돋보인다.이강재 선생의 고조할머니를 위해 지어졌다는 이금재 고택. 선생은 1930년대 할머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안주인은 흐린 사진 속에서도 환히 웃고 있었다. 당시 여자들을 위한 집이라는 것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었을까? 지금의 아파트는 여자를 위한 팬트리, 여자만을 위한 맘스 오피스와 드레스룸 등을 차별화한 공간을 내세우고 있다. 실용성을 위한 공간이거나 일부는 다분히 과시를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1900년대의 여성들이라면 어땠을까? 아마 당나귀 귀를 닮은 임금님의 실체를 폭로할 대나무밭이 필요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유 없이 배치되는 공간은 없다. 이금재 고택이 특히 그러했다.
 
뒤안 화채의 꽃. 사진/알토마토
 
◇그래서 뒷모습이 아름다운 집
 
웅장해보이기 위한 집은 앞으로 ‘ㄷ’자 형태를 취한다. 또는 일자로 겹겹이 공간을 배치한다. 바로 옆집인 이용욱 고택은 이렇게 대장부의 패기, 늠름함을 뽐내는 구조다. 멋지지만 숨을 공간은 많지 않다. 이강재 선생은 촬영 중 거듭 말했다. “우리 집은 뒤가 예쁜데. 거기는 찍었어요?” 찍을래야 찍을 수가 없어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집의 뒤안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대청마루를 넘어 안방을 통과하거나 주인의 도움으로 주방문을 열고 진입해야 하니까. 아무리 편한 집이라고 해도 남의 집 주방이나 안방에 거리낌 없이 발을 들이는 사람은 없을 터. 그렇게 만난 집의 뒷모습은 청량함으로 다가왔다. 시원한 그늘이 내려앉은 마루 앞에는 화초와 산등성이 댓바람이 한창이었다. 이강재 선생의 고조할머니는 조각마루에 편히 앉아 뒷산을 바라보았으리라. 이곳에서 이강재 선생은 여동생들에게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주곤 했다.
 
‘ㄷ’자 처마가 만들어낸 하늘풍경. 사진/알토마토
 
◇은밀한 여자들의 공간, 당시의 맞춤형
 
입구에서 보이지 않는 공간, 그러나 사시사철 꽃이 피고 후면의 시원한 산바람이 들이치는 곳. 이금재 고택의 툇마루에서는 안주인들의 수다가 끊이지 않았으리라. 혹자는 이 집의 구조가 폐쇄적이라 말하지만 누군가는 배려 깊다고 말한다. 아담하고 우아하기로 소문난 이 집의 화계는 며느리를 위한 곳이라고 이강재 선생은 귀띔했다. 이금재 고택의 며느리는 마음만 먹으면 밖에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며느리방과 화채, 부엌부터 후면의 광까지 하나의 동선으로 연결되어 있다(이강재 선생은 하교 후 이 광에서 먹던 꿀이 진짜 꿀맛이었다는 회고를 했다). 마지못해 밖으로 나가야 하는 순간이라면 그건 아마 마당의 우물을 사용할 때, 뒷간에서 볼일을 볼 때 정도가 아니었을까?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했던 과거임을 생각해볼 때,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은 적지 않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금재 고택은 안채 뒤쪽을 향해 ‘ㄷ’자로 앉았다. 여자들은 ‘ㄷ’ 자 안쪽으로 숨어들었으리라.
 
이식재 고택,이용욱 고택.그리고 나란히 이금재 고택. 사진/알토마토
 
◇일년에 네 번, 지붕의 낙엽을 쓸던 집
 
“비가 새면 안 되기 때문에 일 년에도 네 번 정도, 아버님이 지붕에 올라가서 낙엽을 쓸고 관리에 신경을 많이 었어요.” 고택은 손길로 살아간다. 지금은 과거보다 줄어든 규모이지만 그럼에도 9900㎡ 규모의 고택은 여전히 크다. “관리를 하면서 자연히 운동도 되고 체력관리도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깨끗한 마당에서는 이파리 한 장도 두드러져 보였다.그날도 이강재 선생은 집을 쓸었다. 과거 삼대가 살던 집은 이제 곳곳이 비어 있지만 그럼에도 집주인은사람의 빈곳까지 어루만진다. 안주인을 위해 짓고 무심한듯 지붕을 쓸고 정원을 가꾼 바깥양반. 폐쇄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당치 않고 배려라고만 표현하기에도 아쉬운 이 집의 매력.  계속 이어졌더라면 지금의 주거공간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었을지 상상하게 된다.
 
이도화 알토마토 PD
 
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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