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열차가 달린다. 겨울의 나라에 설국열차가, 무더운 한반도에 부산행 KTX 열차가 달린다. 영화 속의 열차는 하나의 사회 혹은 세상의 압축판이기에 어김 없이 악역들이 등장한다.
설국열차의 나이 든 여성통치자는 배우 틸다 스윈튼이, 부산행의 나이 든 회사중역은 배우 김의성이 열연한다. 그 대척점에 여자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미래를 암시한다.
최근 75세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동영상 파문에 이어 95세의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6천억 원에 달하는 조세포탈 혐의를 받고 있다. 이 회장은 2년째 의식불명이고 신 회장은 6년째 치매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한다.
새누리당 김희옥(71세), 더민주당 김종인(77세), 국민의당 박지원(75세) 비대위원장은 모두 70세가 넘는다. 폭염의 날씨에 뭔가 군불을 지피고 있다는 손학규 전대표도 70세에 달한다.
한국이라는 열차는 100세 이상 노인이 3000명, 90세 이상은 15만7000명이 넘는 ‘장수만세의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 내년에는 총인구의 14% 이상을 65세 노인이 차지하는 고령사회(Aged Society)가 된다. 반면에 지난 5월 출생아수는 3만4000여명으로 전년 동기대비 2000명 이상 줄었고, 지난 15년간 가장 적은 숫자를 기록했다. 연간 출생아수는 2000년 630여만명에서 지난해 430여만명으로 200만명 가량이 감소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임여성이 크게 줄었고, 줄고 있으며, 계속 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농촌에서는 사망자가 출생아보다 많은 ‘데드 크로스’(Dead Cross)가 확산되고 있다. 20년째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한번도 들리지 않은 마을이 늘고 있다.
인구변화와 세대의 문제를 논하는 데서 그간의 사회적 관심은 경제적 측면에 집중하거나 청년세대에게 무엇을 해 주는 것을 놓고 논란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중동으로 가라”는 발상도 그러했다. 결과는 비참하다. 다수의 젊은 세대가 저임금에 노출돼 있지만 한국사회는 ‘시급 7000원’을 만들어 줄 수 없는 ‘가난한 사회’이고, 정부가 청년수당 사업을 직권으로 취소하는 ‘가난한 나라’였다.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도 결국 윤리학이라고 했던가. 인구변화와 세대의 문제에서 윤리적 관점을 사상하면 노인세대까지 무한 연장될 탐욕과 치정이 인간본성처럼 면죄부를 받게 된다.
재벌총수나 정치지도자급 노인세대와 달리 높은 노인빈곤율에 처한 노인들에게 ‘세대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들먹이는 것은 가혹할 수 있다. 하지만 노인을 앞둔 다수의 베이붐세대에게 닥쳐 올 ‘새로운 노인세대’의 사회적 책임은 발칙하거나 불경스런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망상하는 노인세대가 아니라 사멸하는 존재임을 직시하고 선한 의지를 모을 수 있는 ‘새로운 노인세대’에 대한 상상이다.
결국 눈을 감으면서 한반도의 분단과 군사대결을 후세에게 물려 줄 것인가? 평생을 자신과 가족을 위해 쏟아 부은 전문적 경험과 능력을 사회에 환원할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노인 기초연금을 (최악의 경우) 포기하더라도 아동수당과 어린이 무상의료를 도입할 수는 없는 것인가? 안구와 간, 콩팥, 골수 등을 잘 간직해서 장기기증에 기여할 수는 없는가? 시신을 친환경적으로 말끔하게 정화하도록 유언할 것인가?
유사시에 대비해 연명치료의 배제·존엄사·안락사 등에 대한 생각도 숙명적 과제로 남아 있다.
양극화·격차사회·위험사회·피로사회가 뒤범벅이 된 한국사회는 예측불허의 사회병리현상들을 분출하며 ‘새로운 노인세대’를 호출하고 있다. 앞으로 황혼길에 접어들 지금의 40~50대는 노인홍수시대를 맞이할 장본인들로서 ‘전투적인 사유’를 요청받고 있다.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도 노인의 사회적 책임을 옹호하고 증진하는 제도와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절호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정당의 책임정치, 정부의 공공성 등은 현재의 노인세대의 거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젊은 놈들이 아무리 설쳐도 그 자리의 노인들이 제대로 처신했다면 겪지 않아도 될 비극과 재앙이 너무 많았다. 베이비붐세대가 새로운 노인세대를 창출할 수 있다는 상상이 망상으로 끝난다면, 그런 사회에서 ‘최적의 수명’은 몇 살이 될까?
김병규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