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31일까지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 접수된 폐 질환 인정 신규 신청(가습기 살균제에 사용된 화학물질로 인한 폐 질환 인정 신청)건수는 총 4486건에 달한다. 이중 사망자만 919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안의 심각성이 표면에 드러나자 국회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사고 진상규명과 피해구제 및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8월 29, 30일과 9월 2일에 걸쳐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 결과 옥시레킷벤키저와 SK케미칼 등의 가습기 살균제 가해 기업은 유해성 검증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거나 유해성을 인지하고도 은폐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거라브 제인 전 옥시 CEO와 신현우 전 옥시 사장 등 이번 청문회의 핵심 증인으로 거론된 이들이 대거 불참했다. 청문회에 참석한 몇 안 되는 관계자들 역시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기업을 관리, 감독해야 할 환경부와 산업자원부 등의 정부 부처는 책임회피에 급급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 처리 과정에서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책임을 강제하기 위한 장치 역시 부족해 사실상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사)기업책임 시민센터 이필상 공동대표(사진)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실천되지 않는 현 세태와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기 위한 방안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은 많이 보편화했다. 하지만 기업들의 호응도는 아직까지 매우 낮은 상태다. 물론 기업주가 스스로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하고, 애초에 기업의 경영목표를 사회적 가치창출에 두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들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 사회적 가치 추구와 이윤 추구에 상충하는 지점이 있어서일까?
기업의 이윤추구와 사회적 가치 추구, 분명 상충하는 지점이 있다. 그런데 사실 상충하면 안 된다. 기업은 사회에서 태어나 사회에서 죽는다. 기업의 출생과 소멸이 그렇다. 사회에서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공급하고 그 대가로 사회가 제공하는 정당한 이익을 받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이윤추구는 사회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틀을 벗어난다면, 나아가 사회를 파괴하면서 이윤추구를 한다면, 그런 이윤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니 기업의 정당한 이윤추구와 사회적 가치 추구는 상충할 수 없고 상충되어서도 안 된다.
- 정당하게 이익을 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소유가 분산되어야 하고, 경쟁이 공정해야 하며, 배분이 공평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의 경우 이 세 가지 조건이 거의 안 맞는다. 족벌 소유하고 시장독점하고 분식회계로 이익 빼돌리고 소비자를 속이면서 불량상품을 공급한다. 정부에 로비를 해서 세금도 덜 내니, 세 가지 조건을 회피하면서 이익만 얻으려는 것이다.
- 이것만 지킨다면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
제대로만 된다면, 그렇다. 어떤 기업도 독과점 행위를 하지 않고, 소유가 잘 분산되어 있으면서 이익을 근로자들에게 올바르게 분배한다면, 임금을 잘 지급하고 세금도 제대로 낸다면 말이다.
- 기업이 책임을 다하고 윤리적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기업을 감시하는 눈도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이 이들을 감시하기에는 힘이 부족하지 않은가?
사실 감시의 1차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다. 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니 국민을 위해 기업을 감시해야한다. 공정거래위원회나 금융감독위원회 같은 기관도 있고. 그런데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나아가 정경유착이라는 틀 안에서 감시자가 아니라 동조자, 공범자가 되기도 한다.
일차적 책임이 정부에 있다면 궁극적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은 기업의 투자자이자 소비자다. 다시 말해 주인이다. 주인이면 문제가 있을 때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개개인으로서의 국민은 하기 어렵다. 결국 개인을 대신해 기업 경영을 감시해야하는 처지로서 시민단체의 역할이 상당히 크다.
- 기업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수단 역시 미흡해 보인다.
미흡하다. 가난한 사람이 가게에서 사과 하나 훔치면 감옥에 가지 않나. 반면에 기업들이 불공정한 행태로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사회 가치를 파괴해도 법은 이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부족하다. 그러니 사고가 터져도, 사람이 죽어도, 기업은 법망을 교묘히 피해 간다. 정부 역시 그것을 바로잡을 의지가 부족하다. 자신들도 일종의 이해관계자이니. 심지어는 국민이 최후의 보루라고 믿고 있는 사법부도 범법자에 동조하는 경우가 많다.
-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법제화한다는 것은, 법으로‘건전한 기업 활동을 하자’고 박아두자는 말이 아니다. 나쁜 짓 하는 것만 막자는 거다. 그러기 위해 법적인 장치를 만들자는 거다. 그런데 입법 자체도 어렵다. 입법 움직임이 있으면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논리로 엄청난 거부 운동을 하니. 심지어 거기에 정치인과 정부도 동조하고. 이런 논리는 나쁜 짓해서 경제 살리겠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 법제화가 어렵다면,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강제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은 없는 것인가?
주주의 역할이 중요하다. 국민들이 투표를 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듯 주주가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주주를 위한 기업이 아니다. 결국 주주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기업에 투자를 해서 그 기업이 발전해야 한다. 이게 곧 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에 투자를 하자는 거다. 사회책임투자가 이루어지면 좋은 기업은 많은 자본이 들어와 결과적으로 발전을 하겠고, 반사회적 기업은 투자를 받지 못해 기업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 주주는 투자를 통한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할 텐데 과연 사회책임투자를 실천하려고 할까?
때문에 이익만을 보고 투자하는 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국민의식이 있어야 한다. 단기적으로 보지 않고 기업의 역할, 장래와 사회적인 가치를 보고 투자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 되어야 한다.
- 주주로서의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주주가 책임의식을 갖고 있어야한다. 그런데 보통 주주하면, 돈은 잘 버는지, 주가가 어느 정도 인지, 배당을 얼마나 해주는지, 이런 것들을 주로 생각하니 기업경영이 비뚤어질 가능성이 크다.
- 소액주주는 큰 영향력이 없지 않나?
소유가 분산되어 있으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는 주주의 움직임도 많을 거다. 그런데 현재는 소유가 집중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대주주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그들이 돈을 많이 내서 대주주가 된 것은 아니다. 현 구조상 쉽게 대주주가 될 수 있다. 순환출자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환출자가 가능하면, 한 기업의 A계열사가 B계열사에, B는 C에, 다시 C가 A에 투자할 수 있다. 주력기업만 통제하면 적은 돈으로 수많은 기업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경제민주화 얘기가 나올 때마다 단골 메뉴로 순환출자를 금지하자고는 한다. 실질적으로 되지 않으니 문제다. 박근혜 정부 때 신규 순환출자 금지까지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이미 대기업들은 순환 고리를 수십 개 씩 갖고 있다. 게다가 요즘은 경기가 안 좋아 오히려 순환 고리를 정리하는 상황이다. 신규 순환출자 금지는 거의 의미가 없다.
- 현실적인 대안은 없는가?
특정 기업 주식에 투자를 하면 주주가 된다. 이중에 소액주주는 주주총회에 가서 이야기해봤자 들어주지도 않는다. 힘이 없다는 얘기다. 전문성도 부족하고. 그래도 한 주면 한 주만큼 열 주면 열 주만큼, 주주총회에서 의결할 권리가 있긴 하다. 그래서 기업책임 시민센터에서는 Proxy 운동을 이야기한다. Proxy 운동은 주주의 권리를 보다 전문적이고 힘 있게 행사하기 위해 공정한 시민단체한테 맡겨달라는 거다. 1주씩 갖고 있는 주주 100명이 다 위임을 하면 시민단체가 위임받은 건 100주가 되는데, 그 기업이 발행하는 주식이 총 200주라고 본다면 거의 절반을 갖는 것이니까 큰 힘이다.
- 기업책임 시민센터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사람이 다 같이 잘 살아보자고 만든 것이 사회 아닌가. 사회 구성원이 모두 잘 살기 위해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만든 것이 시장경제고. 시장 경제를 효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기업이다. 그렇게 치면 기업의 주인은 사회이고 사회 구성원인 국민이다. 그러니 기업은 사회를 위해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현실에선 주객이 전도됐다. 기업이 주인이다. 기업이 어떤 고용정책을 쓰느냐에 따라 직업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한다. 기업이 어떤 상품을 만들어내는지에 따라 소비행태도 바뀐다. 심지어 기업이 어느 대학을 지원하느냐에 따라 대학 서열도 달라진다. 사회가 기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기업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원래대로 사람이 기업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다. 국민의 기업(소유분산), 국민에 의한 기업(주주가 뽑은 경영진). 국민을 위한 기업(국민을 위해 활동을 하는)이 되게끔. 민주주의의 3대 원칙을 그대로 기업에 적용하면 될 거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듯, 기업의 주인은 주주다.”이 대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있어서 주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주주의 투자로 기업이 운영되니 투자는 단순히 이익을 얻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투자한 돈으로 기업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그 활동의 결과는 제 2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일지도 모른다. 주주로서의 책임의식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김민제 KSRN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