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양진영 기자]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까지 거론하던 당국이 "은행의 신규계좌 발급을 막지 않겠다"며 반발 무마에 나서는 모습이다.
은행과 신규 거래를 거부당한 일부 중소 거래소들이 서비스를 중단하거나 법인계좌 형태로 영업을 하면서 반작용이 발생한 데 따른 대응으로 보인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여전히 은행들의 신규계좌 발급 과정을 세심하게 살피겠다는 방침을 강조하고 있어 사실상 가상화폐 거래가 자율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비트코인 가격이 700만원대까지 떨어진 지난 2일 서울의 한 가상화폐 거래소 앞을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뉴시스
◇ 금융위 "신규계좌 발급, 은행 자율적 판단 사안"…은행, 눈치보기 여전
4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은행이 가상화폐 거래소에 대해 실명확인 계좌를 신규 발급해주는 것을 막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이 발표된 만큼 실명확인 계좌를 발급하는 것은 은행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금융당국은 자본세탁을 방지하기 위해 가상화폐 실명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에 따라 신한·국민·KEB하나·농협·기업·광주은행 등 6개 은행이 지난달 30일부터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서비스’ 시스템을 개시했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자금세탁방지 가이드라인과 은행 현장점검을 시행하며 은행권에 ‘비공식 압박’을 하고 있다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하소연이다.
자금 세탁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책임도 은행이 뒤집어 써야하는 탓에 은행들이 '눈치보기'에 급급하며 소극적인 행보를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결국 당국 승인없이 은행 자율에 맡긴다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셈이다.
이 때문에 은행권에서는 소극적인 행보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실제 지난해 코인원에 가상계좌를 발급했던 산업은행은 가상화폐 거래소와의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산업은행은 실명확인 시스템도 구축하지 않았다. 실명이 인증되는 가상계좌를 내주는 은행 또한 신한, 농협, 기업은행 세 곳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중소 거래소와는 계약이 이뤄지지 않은데다 기존 거래소와의 신규 계좌 발급도 연기되는 등 ‘눈치 보기’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더욱이 거래소 폐쇄 방안에 대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이 압수수색을 받으며 시장은 얼어붙은 모습이다.
지난 1일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해 해킹 공격을 받은 빗썸의 개인정보 관리 등에 대한 자료를 압수했으며, 이를 토대로 개인정보 보호조치 의무 이행에 대한 과실이 드러날 경우 관련자를 처벌할 방침이다.
이에 빗썸과 거래 계약을 맺은 신한은행의 계좌 발급도 연기됐다. 신한은행은 코빗과의 신규 계좌 발급도 재검토 중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아직 가상화폐 신규 고객에 대한 실명 계좌 발급을 확정하지 않았다”며 “향후 추이를 보고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빗썸 관계자는 “현재 농협은행 계좌를 통한 실명확인 입출금 서비스가 시행되고 있다”며 “신한은행은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일정을 연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법인계좌 고객, 80만명…"제대로 된 정비 필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소거래소들은 아예 거래 자체가 어려운 지경이다.
소형 가상화폐거래소 코인피아는 오는 6일부터 서비스를 중단하기로 했으며, 회원 수 50만명인 코인네스트도 현금 입금이 어려운 상태다. 지난달 오픈 예정이던 한·중합작 가상화폐 거래소 지닉스는 오픈 일자를 이달로 연기했다. 은행 계좌 개설이 막히며 원화 입출금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한국블록체인협회 관계자는 “협회 거래소 회원사 가운데 법인계좌를 사용하는 거래소 이용자는 약 78만7600명으로 추산된다”며 “이들 거래소는 기존에 가상계좌를 사용해 온 거래소들과의 공정한 경쟁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한 중소거래소 관계자 또한 “실명확인 계좌를 받지 못하면 이용자들이 돈을 입금할 수 없다”며 “거래자체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데다 벌집 계좌(가상화폐 거래자의 개인 거래를 장부로 담아 관리하는 법인계좌)나 원화 계좌를 제외한 계좌만 운용될 수밖에 없어 시장이 오히려 음지로 가게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금융당국이 법인계좌 자체를 의심계좌로 규정하고, 문제 발생 시 은행에 책임을 전가하기로 방침을 정하면서 (중소 거래소는) 강제로 퇴출당할 위기에 처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금융당국이 자본세탁 방지를 이유로 시중은행을 우회적으로 압박하면서 제한적 거래실명제를 시행함에 따라 대형 거래소 위주의 독과점과 투자자에 대한 혼선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현재 기존 벌집계좌를 계속 사용하는 방안으로 운영 가능하지만 금융당국의 집중 점검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은행과 거래소의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은행들에게 자금세탁방지 의무가 있는 만큼 금융당국 입장에서 당연히 가상통화 거래소에 대해 조사를 철저히 하겠다는 것이지 시장에 압박을 주거나 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금융권 관계자는 "당국이 말로는 자율을 외치며, 뒤로는 은행들을 압박해 신규계좌 발급이 불가능하게 하는 꼼수를 쓰고 있다"며 "정당한 근거가 없으니 비겁하게 편법을 동원하는 셈인데, 이게 정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가상화폐 시장이 하락세를 보이며 가상화폐에 대한 제대로 된 정비가 필요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대기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금융당국이 은행의 실명계좌 발급을 허가하고, 감독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은행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며 “한편으로 보면 은행을 통해 거래소 압박하는 건데 이 과정에서 잘못된 시그널이 있으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강하게 압박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연구위원은 “세계 주요국에서 규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면서 가상화폐 시장에서 패닉셀이 나타났다”면서 “G20에서도 (가상화폐의) 국제 가치를 논의한다는데 제도화를 통해 제대로 규제하는 것은 실수요자 등을 양성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백아란·양진영 기자 alive02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