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왕해나 기자] 메모리 분야에서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는 취약한 경쟁력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파운드리(위탁 생산) 경쟁력은 크게 개선되며 대만에 이어 세계 2위 수준까지 오르는데 성공했지만 팹리스(설계 전문 기업) 경쟁력은 미국, 일본은 고사하고 중국에 비해서도 뒤처지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분야의 경쟁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시스템 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역할인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중앙처리장치(CPU)처럼 정보를 해석·계산·처리하는 반도체를 말한다. 전자 기기의 뇌 역할을 하는 마이크로컨트롤러(MCU)를 비롯해 이미지 센서, 터치 센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보다 그 규모가 크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지난해 비메모리 분야의 시장규모는 3109억달러로 메모리(1658억달러) 분야의 약 2배에 달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시장에서 1, 2위를 차지하며 60% 점유율을 차지했지만 비메모리 시장점유율은 3.4%에 불과했다. 특히 팹리스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인텔, 퀄컴 등을 보유한 미국이 2010년 이후 약 70%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고 중국은 빠르게 세를 넓히며 10% 중반대의 점유율까지 확보했다.
세계 팹리스 상위 10개 기업(매출액 기준) 중 중국 기업은 2개나 되는 반면 한국 기업은 상위 50개 기업 중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규모가 영세하다. 중국의 하이실리콘은 화웨이 최신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설계할 만큼 높은 기술력을 갖춘 반면, 한국 최대 팹리스인 LG 실리콘웍스는 지난해 약 7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데 그쳤다.
팹리스는 한국이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메모리 반도체는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한 장치산업의 특성을 갖고 있는 반면 시스템 반도체는 생산이 분업화된 기술집약적 산업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구조가 상대적으로 복잡하고 미세공정 보다는 기술력, 창의성에 기반을 둔 회로설계 능력이 요구된다. 김건우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연구원은 “메모리는 대규모 설비투자 뿐 아니라 축적된 노하우가 필요한 반면 팹리스는 설계자의 역량이 중요한 사업인 만큼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내기 유리해 우수한 인재가 풍부한 중국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스템 반도체는 향후 5G,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 등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새로운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자동차용 반도체, 의료용 반도체, 인공지능(AI)용 반도체 등이 유망한 품목으로 주목받고 있다. 내연기관차에는 200∼300개가 쓰이지만, 자율주행차에는 1000∼2000여개가들어간다. 후발 주자인 우리나라 기업들이 돌파구를 만들 수 있는 시기다.
삼성전자는 현재 퀄컴이 주도하고 있는 AP 시장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자동차용 AP 시장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자율주행차용 AP는 고도의 안전성이 요구되는 하이엔드 반도체로 기존의 스마트폰용 AP로는 대체하기 어려워 퀄컴보다 먼저 진출한 삼성전자가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2018년 10월 자동차용 AP인 엑시노트 오토를 출시했으며 2019년 1월에는 글로벌 자동차업체 아우디와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꾸준히 제품을 출시해왔던 이미지 센서 부문에서는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전 세계 시장 점유율 20%(2018년 11월 기준)를 차지하며 이미지 센서 절대 강자인 소니(51%)의 뒤를 잇고 있다. 최근에는 경쟁사 소니의 스마트폰 일부에 삼성전자의 이미지 센서 아이소셀이 탑재될 정도였다. 삼성전자는 이미지 센서 육성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화성 D램 11라인 일부를 이미지센서 라인으로 전환하고 있다.
AI를 구동하기 위한 프로세서도 연구 중이다. AI에 활용될 수 있는 프로세서는 인간의 뇌 신경망을 본떠 만들었으며 복잡한 연산화 학습·추론 등을 할 수 있다.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에서는 스마트폰에서 딥러닝 소프트웨어를 구동할 수 있는 인공지능 신경망 뉴럴 프로세서, 인간 두뇌를 모방한 차세대 뉴로모픽 프로세서 등을 개발 중이다. 지난달부터는 위구연 하버드 전기공학·컴퓨터 과학 석좌교수를 삼성전자 신임 펠로우로 영입해 뉴럴 프로세서 기술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다만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의 여파로 육성 단계인 한국 시스템 반도체 성장이 저해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 산업 특성상 현재로서 가장 수출 의존도가 높은 중국 공급망에 대한 접근성이 중요하다. 미·중간 기술패권 경쟁이 장기화될 경우 중국의 반도체 수요는 더욱 중국과 대만을 중심으로 형성될 것이고 우리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시장 진출에 제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편으로 우리 기업들은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첨단 장비를 미국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어 미국과의 관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해외에서 한국 반도체 인력 흡수를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중국 반도체 업계는 ‘3배 연봉’을 내걸고 설계 등 전문 인력을 유혹하고 있다. 매년 20건 이상의 기술 해외유출·시도 사례가 적발되는 실정이다. 김 연구원은 “미·중 분쟁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해외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국내 반도체 설계 부문 육성 및 장비·소재 부문의 자급률 확충 역시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경영자에 대한 산업기술보호 교육 확대, 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 강화, 퇴직한 경력자들이 재취업할 수 있는 생태계 구축도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왕해나 기자 haena0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