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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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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뉴스토마토 산업1부 박혜정입니다.
달콤한 거짓말

2025-04-07 15:40

조회수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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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박혜정 기자] 지난 주말 책모임에서 헌법 관련 책을 읽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헌법 전문이었습니다.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여’,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헌법에 이런 개혁적인 문구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은 이 정의로운 문장들과 동떨어져 있는 건 아닌가.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 걸려 있는 헌재 상징물,(사진=연합뉴스)
 
저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기득권의 권력 세습은 뚜렷합니다. 지난해 한국은행이 발표한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방안’ 보고서를 보면, 이른바 명문대 진학은 75% 부모 경제력에 좌우됩니다. 고소득층의 자식이 의사될 확률은 저소득층 자식에 비해 12배 높습니다. 로스쿨 진학 후 변호사 되기까지 수 년이 걸리고, 학비 생활비까지 수 억원이 든다고 알려졌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 가난한 이들에겐 쉽지 않은 일들입니다.
 
그러나 제 말에 공감에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지역균형발전 전형도 있고, 장학금 제도도 잘 돼있어 모든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하더군요. 누구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말도 따라왔습니다. 누구나 전문직이 되긴 어렵고 그건 부유층도 마찬가지라는 뉘앙스였습니다. 모두가 같은 선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뒤에 있다고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습니다. 모두가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말은,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는 달콤한 거짓말이라 믿는 전 답답했습니다. 
 
그날 친한 언니가 집에 놀러왔습니다. 언니는 마음씨가 좋지만 답답한 면이 있습니다. 얘기하면 맥락을 따라오지 못하곤 합니다. 질문했을 때 답이 길게 늘어지고 요점없는 느낌입니다. ‘절연(絶緣)’같은 단어도 알지 못합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부모님은 언니를 돌보지 못했습니다. 학교 성적은 꼴등이었고 대학에 가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단순노무직을 업으로 살고 있습니다. 
 
방 안 기타를 만지작 거리던 언니에게 단기속성 기타 과외를 해줬습니다. 언니는 소질이 있었습니다. 습득력도 뛰어났습니다. 미처 몰랐던 모습이었습니다. 즐거워하는 언니를 보며 책모임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보면 ‘노력한 만큼의 삶’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니가 돈 많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지금 삶은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요.
 
물론 경제적 조건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돈이 많아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돈이 없어도 이루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개인의 성취가 온전히 자신의 노력 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전 구두닦이를 하면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가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 떠오릅니다.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언니와 같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는 너무도 무관해 보인 헌법 문구는, 누구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거짓말은 아닐까.' 언니의 웃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박혜정 기자 sunright@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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