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각하는 과거 대법원 판결의 소수의견 논리가 적용됐다. 법조계에서는 상고심에서 정반대 판단이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미 대법원이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재판장 김양호)는 지난 7일 강제징용 피해자 송모씨 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 등 16개 기업을 상대로 낸 86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소송을 통한 개인 청구권 행사는 제한됐고, 일본 기업의 손해 배상을 인정할 경우 국제법을 어기게 된다는 논리다.
이에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 16개 단체는 공동 논평을 내고, 재판부가 청구권 협정 해석의 안정성을 확보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 씨의 아들 임철호 씨와 장덕환 일제강제노역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회장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제철 주식회사와 닛산화학 등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식민지배 불법성' 원칙 벗어나"
국제통상 전문 송기호 변호사도 재판부가 헌법이 부여한 조약 해석 권한을 포기하고, 헌법 전문에 있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등 일제 식민지배 불법성 원칙을 벗어났다고 비판했다. 송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우리 헌법 질서 내에서 유지되기 어려운 판결"이라며 "국제법 조약이라 하면 그에 대해 우리 헌법질서는 아예 적용을 멈추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이어 "우리나라가 헌법 절차에 따라 협약을 체결·비준했고 헌법이 조약과 국내 법률에 같은 효력이 있다고 해서 하나의 규범이 된 것"이라며 "정말로 국제법, 비엔나협약에 충실하려면 (일본 회사에) '이 협정대로 하려면 국제 중재로 가야지 왜 우리 법원에서 해석하느냐'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재판부가 청구권 협정이 불법성 판단 대상이 아니라고 한 점에 대해서는 "그 중요한 헌법의 원칙에 대해서는 판단 대상이 아니라고 하면서 막상 협정 해석은 자세하게 했다"고 꼬집었다.
대법 전합, '샌프란시스코 조약' 원용
앞서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신일철주금 주식회사를 상대로 낸 1억원 위자료 지급 소송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단한 원심을 확정했다.
당시 다수 의견을 낸 대법관 7명은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일본 정부의 불법적인 한반도 식민지배·침략전쟁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위자료 청구권은 협정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청구권 협정이 일본의 불법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청구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권순일·조재연 대법관 소수의견
반면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원고들 개인의 청구권 자체가 소멸되거나 포기되지 않았지만, 일본이나 일본인 상대 소송으로 권리행사하는 일은 제한된다고 봤다.
반대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협정문에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 것이 된다'는 표현에 원고의 청구권도 포함된다고 판단했다.
한국 정부가 희생자 지원법 등으로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금을 지급해온 점에 대해서도 "청구권 협정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이 소송으로 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이 제한된 결과, 대한민국이 이를 보상할 목적으로 입법조치를 한 것"이라고 봤다.
이번 사건 재판부도 '최종 해결'에 초점을 둔 대법원 소수의견을 따랐다. 일본 식민지배가 불법인지 여부는 청구권 협정의 해석과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다.
민사 34부, '대법 전합' 사실상 폄하
대법원의 위자료 청구권 인정에 대해서도 "단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한 것"이라며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식민지배의 적법 또는 불법에 관해 상호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일괄해 이 사건 피해자들의 청구권 등에 관해 보상 또는 배상하기로 합의에 이른 '조약'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날 민변 등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원용하는 것은 '불법행위로 인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는 청구권협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고, 이것은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을 원용한 것이지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 씨의 아들 임철호(왼쪽) 씨와 장덕환 일제강제노역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회장, 강길 변호사가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제철 주식회사와 닛산화학 등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상고심, '전합 법리' 따를 가능성 높아
법조계에서는 이번 재판부 판단이 상고심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송 대리인이자 논평 초안을 맡은 임재성 변호사는 "대법원 법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급심에서 대법원 판단과 다른 결론을 냈다는 이유로 전원합의체가 다시 열릴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도 내놨다.
임 변호사는 "전원합의체는 한 번 법리가 만들어지면 10년쯤 있다가 다시 판단하는 것이 통례"라며 "비슷한 사건들이 대법원에 계류돼 있지만 전원합의체를 열지는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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