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효선 기자] "언니 도와주세요. 하루빨리 가족 품에 언니를 모실 수 있도록 지문을 잘 채취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20여 년 전 김희숙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과학수사대 광역1경감은 연쇄살인범 유영철에 의해 잘려진 시신의 손목을 붙잡고 신들린 사람처럼 피해자 시신에게 얘기했다. 김 팀장이 간절하게 부른 '언니'는 피해자다. 당시 강력사건 전담 CSI요원 국내 여경 1호인 김 경감은 유영철 연쇄 살인사건에 투입돼 토막 시신의 손목을 붙잡고 흘러내리는 부패액을 닦으며 훼손된 그녀의 손가락 지문을 밤새 채취하고 또 채취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유전자 결과를 기다리자고 했다. 하지만 김 경감은 그만둘 수 없었다. 국과수 결과가 나오기까지 2주간의 시간을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개의 손가락으로 많게는 161번의 반복 지문을 채취했고, 채취한 쪽지문을 밤새도록 감정한 결과 피해자들의 신원을 하루 만에 확인했다.
김 경감은 22년간 강력사건 현장을 누비며 수많은 죽음과 마주했다. 자타 공인 ‘지문감정 1인자, 여경 베테랑 CSI요원’로 꼽히지만, 현장은 언제나 어렵다. 죽은 이는 말이 없지만 김 경감은 단서가 나올 때까지 사건해결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고, 수시로 사망한 피해자에게 기도하듯이 말을 걸었다.
김희숙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과학수사대 광역1팀장. (사진=김희숙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팀장)
"유영철 사건 피해자 시신 인도하던 날 잊을 수 없어"
김 경감은 “(유영철에 의한) 피해자 시신을 당시 서울 신월동에 있던 국과수에 인도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국과수 부검대 위에 놓인 피해자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됐다. 시신들을 유가족에게 인도하는 과정에서 한 아버지가 딸의 이름을 외치며 다급하게 딸의 시신에게 달려들었다. 부검대에 뛰어들다 제지된 아버지는 주저앉아 오열했다. 국과수 부검실은 유가족의 오열로 가득했고, 그 현장에 있던 경찰관, 국과수 법의관들도 말없이 눈물을 삼켰다.
그날의 기억과 사건 현장에서 오열하는 수많은 피해자, 유가족들의 눈물은 김 경감을 한 사건이라도 소홀함 없게 더욱 더 치밀하게 현장 수사를 하도록 사건현장과 업무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이후 김 경감은 동작구 한 사우나에서 발생한 살인 방화사건에서 피해자 시신 피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지문을 채취해 범인을 찾아내기도 했다. 시신 피부에서 채취한 쪽지문(일부분만 남은 조각지문)을 채취해 범인을 찾아낸 사례는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던 어느 날 김 팀장의 꿈에는 피해자가 찾아와 울 때도 있었다. 범인을 잡고야 말겠다는 김 경감의 무거운 사명감은 그의 꿈에까지 나타나 일종의 부채의식으로 재현된 것으로 보인다. 증거물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화학약품을 많이 쓰다 보니 몸이 상하기도 한다.
왜 이런 삶을 사느냐고 묻자 김 팀장은 피해자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이 일을 한순간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김 경감은 “(유영철 사건은) 힘들 때마다 저 스스로를 다지게 만드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서 “유영철 사건 뿐 아니라 모든 사건이 제게 다 중요하고 아프다. 한 사람도 억울한 죽음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연쇄살인 줄었지만 고독사·자살 늘어
김 경감의 설명에 따르면, 경찰 수사기법이 발전하면서 연쇄살인 사건은 점차 줄었다. 현재 경찰에 들어오는 사건도 미제로 남는 경우가 제로에 가깝다. 대신 최근에는 고독사, 자살 등 변사사건이 늘어나는 추세다.
김 경감은 “예전엔 살인범이 바로 검거되지 않다 보니 연쇄 살인 사건이 많이 발생했는데, 과학수사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지금은 강력 살인사건이 많이 줄었다"며 "요즘은 변사사건이 많이 발생하는데 서울만 해도 현장 출동 사건 중 변사사건이 55%가 넘을 정도로 많다. 범죄 관련성 여부를 판별해 내는 것이 그만큼 더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변사사건의 종류는 다양하다. 고독사, 자살 등이 대부분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살 등을 가장한 살인사건 또는 반대로 남은 가족을 위한 보험금 취득 목적으로 타살처럼 꾸민 자살 사건도 있다.
과학수사의 발달은 변사사건 중 이런 정황을 금방 잡아내고 있다. 그만큼 완전범죄 역시 불가능에 가까워지는 모습이다.
김 경감은 “범인들은 경찰에 잡히지 않으려고 다양한 방법으로 증거를 은폐하는 등 경찰과의 두뇌싸움을 벌이지만 경찰의 수사기법은 그들(범인)을 능가해왔다”며 “우리는 항상 연구한다”고 강조했다.
어린시절 꿈은 성악가
그렇게 40여 년간 김 팀장은 과학수사업무에 자신의 일생을 바쳐왔다. 숨 가쁘게 살아온 김 팀장 삶의 궤적엔 항상 ‘1호’,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2012년 여경 최초로 현장감식 분야 ‘전문수사관 마스터’ 인증을 받고, 2016년에는 여경 첫 대한민국 과학수사대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야말로 ‘특진’ 인생이다.
그는 과학수사를 “제 인생이자 제 삶 자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의 삶은 챙기지 못했다. 김 경감은 “가끔 제 자신에게 미안할 때도 있다”며 “1년에 한 번씩은 자신에 선물 같은 여행을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성악가가 꿈이었던 그는 오페라를 좋아하고, 피아니스트 조성진 연주와 가수 임영웅의 음악을 즐겨듣는다고 한다.
김 팀장은 퇴직 후에도 후진양성에 힘쓸 계획이다.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퇴직하고 나서도 계속 과학수사 업무를 하게 될 것 같다”며 “저를 필요로 하는 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고, 과학수사 정책마련에도 기여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희숙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과학수사대 광역1경감이 경찰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김희숙 서울경찰청과학수사대 경감)
박효선 기자 twinseve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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