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신'의 특징은 단단함과 유연함이 공존한다는 점에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과 원칙이 있다면 이를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가는 강단이 있었다.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부산 험지 출마를 세 차례 강행한 것이 대표적 예다. 패배할 줄 알면서도 도전한 건 자신이 품은 지역주의 타파라는 정치적 가치를 조금이라도 진전시키기 위한 그의 의지 때문이었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유연함도 있다. 한미FTA와 이라크 파병 결정은 당시에는 지지자들로부터 비판 받았지만 그의 유연함이 빛나는 결과물이었다. 또 보수정당과 연정을 해서라도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는 결기도 보여줬다. 이는 현재 민주당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가치다. 원칙있는 패배를 위해 험지에 출마하는 도전 정신도, 정파를 뛰어넘어 다른 진영의 정책을 과감히 수용하는 실용 정치도, 이제는 민주당의 옛 모습일 뿐이다. 그러면서 8월 전당대회를 앞둔 이 시점에 모두 '노무현정신'을 이야기한다. 친문(친문재인), 친명(친이재명)으로 갈라진 현 상황을 '노무현'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어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보려는 심산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노무현정신'은 알맹이가 빠진 전략적 구호다. 이에 <뉴스토마토>는 앞으로 3차례 연속 기획으로 진짜 ‘노무현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편집자주)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세계 어느 나라 중에서도 서로 갈라져서 반목하고 불신하고 싸웠던 역사 치고 후손들에게 엄청난 불행을 남겨주지 않았던 역사는 없습니다. 분열은 망국으로 이어지므로 우리는 이 분열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정치의 분열을 극복해야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있는 겁니다."
지난 2001년 11월10일, 당시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무현과 함께 하는 사람들·2001 무주단합대회'에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승리를 다짐하며 대의원들에게 한 연설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 오랜 기간 '통합'을 강조해왔다. 2002년 대선 당시에도 영호남 화합, 정치적 통합 등 국민 통합을 시대 정신으로 봤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인 '성공과 좌절'에서도 "(국민통합은 대선)경선 때 핵심 의제였는데, 그 후 본선에 와서는 호응이 떨어졌다. 대신 먹고사는 이야기가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것(국민 통합)이 최고의 과제였다"고 회고했다.
지난 2006년 4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여야 원내대표를 청와대 관저로 초청해 조찬간담회를 갖고, 사학법과 각종 입법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사진=노무현재단)
특히 통합의 요체인 대화와 타협은 노 전 대통령이 말한 '민주주의 3단계론'의 마지막 과제였다. 노 전 대통령에 의하면 민주주의 3단계론은 반독재 투쟁에 이어 투명·공정사회 구축과 지역구도 통합,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정착 순으로 진행된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7년 신년 연설 당시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대해 "(민주주의 2단계 과제)다음 시대의 과제는 관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로 가는 것"이라며 "정책을 중심으로 토론과 타협이 일상화되고, 연정, 연합정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수준의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취임 때부터 당시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 선거제도 변경을 전제로 연정을 제안했다. 한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이상의 의석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선거제도 변경에 찬성하면 한나라당이 추천한 인사를 총리로 기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2005년 6월 한나라당에 선거구제 변경에 동의해준다면, 국무총리를 포함한 장관 임명권을 줄 수 있다고 연정을 제안했다. 이른바 '대연정'이다. 소선거구제에서 호남에선 민주당 계열 후보만, 영남에선 한나라당 후보만 의원으로 뽑히는 지역주의 구도를 타개하자는 발상이었다. 당시 한나라당도 거부하고 지지층 내에서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에 대한 반발이 커 제안으로만 끝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노 전 대통령은 보수정당과 연정을 해서라도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는 결기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무현정부 청와대에서 정무수석을 맡았던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뉴스토마토>와의 통화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초기에 눈부신 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정의당과 합당해서 민주자유당이라고 하는, 그만한 의회 기반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아무리 대통령이 권력을 가져도 결국은 의회 기득권 카르텔이라는 게 워낙 막강하고, 소수 세력 아무리 대통령이 권력을 가지고도 정책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은)처음부터 연정을 구상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파를 뛰어넘는 정치적 통합을 추구하려고 했던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13주기를 맞는 지금도 다시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현대 정치에서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과 같은 연합정치 시도가 드물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통합, 협치 구상의 종착지는 정치개혁이었다. 국회 이해관계로 인해 정치제도 개혁이 어려우니 실질적으로 대연정을 통해서라도 선거제도 개혁이나 개헌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던 인사들은 그의 통합 의지는 지금 정치권에서도 되돌아 볼만하다고 조언했다.
한창민 노무현재단 경영기획본부장은 "노 전 대통령은 제도 개혁을 중시했다"며 "올바른 제도가 있어야 그 안에서 협치나 상생이나 통합적 논의가 가능하다고 봤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의 협치, 상생의 정치를 기준으로 현재를 평가한다면, 이전에 이재명 의원 등 민주당에서도 일부 이야기했지만 여야를 떠나서 한번쯤은 정치개혁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가 이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 2004년 7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수보회의를 주재하며 보고를 받고 있다. (사진=노무현재단)
하지만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를 거치면서 지금의 민주당에는 노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통합의 정신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 편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주의가 민주당 내부에 팽배해 있다는 평가다. '조국 사태' 이후 민주당은 자기편만 감싸는 듯한 극단주의 행태를 보이면서 제1야당인 국민의힘과의 협치 공간을 스스로 좁혔다. 여야가 극명한 이견 대립을 보였던 임대차 3법과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의 필요성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나 민주당의 수적 우세 속에 강행돼 처리되는 사례도 나타났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석 의석을 획득한 것이 오히려 협치 분위기를 만드는 데 독이 됐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오히려 '노무현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잇속챙기기에만 이용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지난달 23일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 13주기 추도식 당시 민주당에서는 "노무현정신이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는데도 윤석열정부는 검찰 공화국을 향해 속도를 내고 있다"며 "윤석열정부의 오만과 독주에 맞설 수 있는 지방정부를 세워 우리 민주주의에 힘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추도식 메시지를 통해 민주당은 진영 결집을 노린 것이다. 같은 날 국민의힘이 지방선거 관련 내용 언급없이 통합을 강조한 것과 대비됐다. 당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민주당의 '노무현정신' 해석에 진정성마저 잃어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앞서 민주당은 문재인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진행된 노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서는 국민 통합을 기치로 한 '노무현정신'을 강조했다.
노무현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안일원 리서치뷰 대표는 "민주당이 세가 불리하고 소수일 때는 '대연정을 하자', '통합의 정치를 하자'고 하면 상대가 안 들어줄 가능성이 높지만 민주당이 국회가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에게)통 크게 협조하겠다고 하면 국회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며 "민주당이 기조를 바꿔서 국민을 위해 필요한 정책들에 대해서는 협조하고, 국민의힘에도 대신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인사를 하라고 했다면 윤석열 대통령이나 국민의힘도 일방적으로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 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3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리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 13주기 추도식 참석을 마치고 고인의 묘역에 참배하고 있다. (이재명 캠프 제공, 뉴시스 사진)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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