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Inflation Reduction Act)은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에 직격탄이 됐다. 이 법은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 회원국인 3개 국가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만 세금 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한국산 전기차는 1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보조금 혜택이 사라지게 된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는 한국산 전기차가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산술적으로 매년 10만대 이상의 수출 차질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와 더불어 국내 1만3000여개에 달하는 부품 업체의 어려움도 우려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곧바로 미국으로 출국한 후 약 2주 동안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한국 자동차 업계가 볼 피해에 대한 우려 표명과 함께 차별적 조처 면제를 요청하는 서한을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냈다.
현대차와 기아는 현재 미국 시장에서 5개 전기차 모델을 판매하고 있지만, 이들 모델은 모두 한국에서 생산한 후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어 보조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앞서 현대차그룹은 지난 5월 방한한 바이든 대통령에게 50억달러의 추가 투자를 약속하는 등 100억달러 규모의 신규 투자를 추진하기로 했지만, 이번 IRA 발효로 사실상 '배신'을 당했다.
물론 우리나라 정부에서도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외교부 등 관계자로 구성된 합동대표단을 긴급 파견하고 통상교섭본부장이 출국하는 대응하고 있지만, 뒷북이란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사실상 미국의 태도를 바꾸기는 어렵다는 내용의 보도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한 매체도 우리나라 전문가와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등 뒤에 칼을 꽂은 것'이란 표현을 보도에 실었다. 이는 IRA에 대한 우리 자동차 업계의 심정을 그대로 반영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지난달 초 우리 정부가 미국 주도의 반도체 협의체인 '칩(Chip)4' 예비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당시에도 산업계는 '경제 안보 강화'를 강조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반도체 전문가 3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칩4 논의가 국내 반도체 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해46.7%가 '부정적', 36.6%가 '긍정적'이라고 응답하는 등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은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새 정부는 출범 전부터 민간 주도의 성장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하지만 최근 급격하게 변하는 대외 환경에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성장은커녕 생존마저도 민간이 스스로 챙겨야 할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전기차와 반도체 산업 모두 우리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점차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능력을 제때 발휘하지 못한다면 금세 위기에 빠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등에 칼을 꽂다', '배신하다' 등의 뜻인 숙어 'stab in one's back'에 사용되는 영어 단어 'stab'에는 '시도', '도전'이란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산업이 처한 현재의 상황은 당장 배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미래 성장을 위한 새로운 시도이자 도전일 수도 있다. 이러한 시도와 도전이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정부의 시의적절한 대응과 민간의 역량 집중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정해훈 재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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