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상법 개정, 자본시장 철학 변화의 첫걸음 되길
2025-03-17 06:00:00 2025-03-17 06:00:00
지금은 학자들의 논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잠잠해졌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약 15년간 금융경제학 분야에서 가장 뜨거웠던 주제는 국가의 법원(法源, Legal Origin)이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주주의 이익에 초점을 두고 관련 법들이 설계된 영미법·스칸디나비아법 계통을 따르고 있는 국가들은 주식시장 위주로 자본조달 시장이 형성되는 반면, 채권자 보호에 중점을 두고 관련 법이 제정된 독일법·프랑스법의 전통을 따르는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주식시장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은행 등으로부터 받는 대출을 통해 기업이 성장해 나간다는 것이 당시 주요 연구들의 공통된 결론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라파엘 라 포르타(Rafael La Porta), 안드레이 슐라이퍼(Andrei Shleifer) 등 저명한 금융경제학자들이 1997년 경 처음 주장한 이후, 자본시장의 모든 현상을 법체계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학계를 뒤덮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흐름에 대해 반기를 드는 연구들도 많이 등장하여 2000년대 내내 지리한 논쟁이 이어졌다. 그리고 기나긴 학계에서의 논쟁은 이제 어느 정도 다음과 같이 결론이 난 상태이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법이 자본시장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대륙법, 그 중에서도 일본법에 영향을 미친 독일법 체계를 따라 형성되었다. 독일법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모든 이해관계자를 충실히 고려하고자 하고, 따라서 채권자나 노동자의 권리를 강하게 보호한다. 이러한 배경 하에 구축된 국내 법은 고속성장이 이어진 60~80년대에도 주식시장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미진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주식시장 대신 국내 기업들은 관(官)이 통제하고 은행이 수행하는 자원 배분에 입각하여 주로 성장하였고, 이는 외환위기 이전까지 국내 기업들의 기이할 정도로 높은 부채 비율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오랜 시간이 지나며 사회, 문화 전반적으로 일본의 영향이 옅어지고 미국식 제도들이 도입되며 점차 양상이 변화하게 된다. 특히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IMF에 의해 영미식 제도가 경제 분야 전반에 급속히 이식되며 자본시장 참가자들의 인식은 '혁명적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절 사회에 발을 내딛었던 세대마저 50대 중후반이 되어버린 현 시점에서, 대다수 투자자들은 주주의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당연한 상식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25~30년 사이의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기업의 이해관계자 중 누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지는 철학의 문제다. 주주가 우선인지, 채권자나 노동자, 지역사회까지도 고려해야 하는지는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다. 문제는 채권자의 이익에 초점을 두고 있던 국민들의 인식이 한 세대만에 주주의 이익 보호를 중시하는 쪽으로 빠르게 전환된데 반해, 법은 그 인식 변화를 반영하지 못 한 채 과거에 머물러 있고 이 과정에서 '아노미(Anomie)'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번 상법 개정의 진정한 의미는 그 '철학적 변화'를 법에 반영하는 데 있다. 이사의 주주충실 의무는 지극히 선언적인 조문이고, 그 자체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는 힘들 것이라 필자는 판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상법 개정은 국민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동떨어져 있었던 상법의 기본 철학을 수정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중요한 시발점이다. 이 대원칙 하에서 후속 입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다양한 관련 판례가 축적되어야 한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본 시장이 진정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에 필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부에 후속 입법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상법 및 자본시장법 개정에 작은 영역이나마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은, 우리 자본 시장 전반에 적용될 '철학'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다. 지난 20년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최대 화두였던 ESG는 주주의 이익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었던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대두되었다. 반면 채권자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로 자본시장이 빠르게 재편되어 온 한국 시장에서는 변화한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 이사의 주주충실 의무의 상법 반영은 첫 걸음마였을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여전히 멀다. 
 
윤태준 액트 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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