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영재’가 커서도 세계 최고일까요? 과학이 내놓은 결론은 예상과 달리 “대체로 그렇지 않다”였습니다. 과학·음악·체스·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인물들의 성장 경로를 대규모로 분석한 최신 연구에서, 청소년기 두각을 나타낸 ‘조기 영재’와 성인이 되어 최고 성취를 이룬 인물들은 대부분 다른 집단이라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오히려 성장 속도가 느렸고,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경험을 축적한 이들이 최정상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12월18일 실린 이 연구를 주도한 것은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란다우 공과대학(RPTU)의 아르네 귈리히(Arne Güllich) 교수입니다. 아르네 귈리히 교수는 독일과 미국의 여러 대학 연구진과 이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한 영역에 집중하는 조기 영재 교육이 세계적인 수준의 성취에 오르는 데는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미지=챗GPT 생성)
청소년기와 성인기 불일치 90%
연구진은 노벨상 수상 과학자, 세계적 작곡가, 올림픽 메달리스트, 최정상급 체스 선수 등 3만4000명이 넘는 세계 최고 성취자들의 성장 이력을 종합 분석했습니다. 과학·음악·체스·스포츠 등 서로 다른 분야를 한 데 모아 비교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분석 결과는 우선 청소년기 최상위 성취자와 성인기 세계 최상위 성취자는 약 90%가 서로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성인이 되어 정점에 오른 이들은 어린 시절 또래 가운데서 반드시 상위권이 아니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래의 세계적 성취자들은 일반적으로 초기에 단일 분야에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양한 학문 분야, 음악 장르, 스포츠, 직업 등 다양한 활동을 탐구했습니다. 반면에 어린 나이부터 한 분야에 집중해 빠른 성과를 낸 경우에는, 성인기 세계 최고 수준까지 도달하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드물었습니다.
그동안 영재 교육과 엘리트 육성 정책은 대체로 비슷한 전제를 공유해왔습니다. ‘어릴 때 뛰어난 아이를 선별해 한 분야에 집중 투자하면 최고 성취로 이어진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이러한 통념이 연구 표본의 한계에서 비롯된 오해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기존 연구 상당수가 청소년이나 준엘리트 집단에 초점을 맞췄고, 성인기 세계 최고 성취자들의 장기 성장 과정을 체계적으로 살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귈리히 교수는 “기존의 연구는 ‘어릴 때 잘하는 아이가 어떻게 성장했는가’만을 보았을 뿐, ‘성인이 되어 최고가 된 사람은 어린 시절 어떤 경로를 밟았는가’라는 질문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최고 성취 수준 개발 흐름. 세계 최고 수준의 성취자들은 다른 동료들에 비해 여러 학문의 탐구에 참여했고,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낮은 수준의 성취를 보였다. (이미지=<사이언스>)
연구진은 세계 최고 성취자들의 공통된 성장 패턴을 세 가지 가설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탐색-적합 가설(search-and-match hypothesis)’로 여러 분야를 경험할수록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영역을 발견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학습 자본 증강 가설(enhanced-learning-capital hypothesis)’입니다. 다양한 학습 경험이 인지적·기술적 토대를 넓혀, 이후 특정 분야에 집중할 때 더 큰 도약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위험 제한 가설(limited-risks hypothesis)’로 여러 분야에 참여함으로써 번아웃, 건강하지 못한 업무-휴식 불균형, 동기 상실, 또는 신체 운동 분야(스포츠, 음악)에서의 신체적 부상 같은 좌절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이 세 가지 요인이 맞물려서 장기적으로 보면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게 연구진의 분석입니다.
느린 성장과 ‘다중 경험’의 힘
이 연구는 많은 학부모나 영재 엘리트 교육 신봉자들이 강조하는 ‘조기 선발’과 ‘조기 특화’가 반드시 최선의 전략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탐구와 점진적 성장, 유연성이 조기 집중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연구진은 어린 시절 한두 가지 영역에만 몰입시키기보다, 두세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분야를 탐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들 분야가 반드시 밀접하게 연결될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언어와 수학, 과학과 음악처럼 서로 다른 조합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연구진이 예로 든 인물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입니다. 그는 위대한 물리학자였을 뿐 아니라, 평생 음악을 사랑하며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이런 다층적 경험이 사고의 폭을 넓혔다는 해석입니다.
귈리히 교수는 “자신에게 맞는 분야를 찾고, 장기적인 학습 역량을 키우며, 성장 과정의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합니다. 이 연구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재능은 좁은 영역에서의 집중이 아닌 다양성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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