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화자는 어린 나이에 작은 할아버지 아돌프의 집에서 만난 분홍색 옷의 신비로운 여인을 기억한다. 어린 화자의 눈에 그녀는 그저 한 명의 여성이 아니라, 우아함과 고귀함이 응축된 하나의 완벽한 예술적 기호로 각인된다. 장밋빛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화자의 상상력 안에서 숭고한 존재로 덧칠해진다.
"그 여인은 숙부가 제복 차림으로 그녀를 맞이하던 흡연실에서, 자신의 부드러운 몸과 분홍색 실크 드레스, 진주 장신구, 그리고 대공과 교분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우아함을 사방에 퍼뜨리고 있었다(Comme celle-ci, dans le fumoir où mon oncle était en vareuse pour la recevoir, répandait son corps si doux, sa robe de soie rose, ses perles, l’élégance qui émane de l’amitié d’un grand-duc...)."
— Marcel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Tome I, Du côté de chez Swann, Gallimard,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87, p. 76.
세월이 흐른 뒤, 이 찬란했던 기억의 주인공이 사실은 사교계에도 끼지 못한 고급 창녀, 훗날 스완의 아내가 되는 '오데트 드 크레시'였다는 사실을 화자는 깨닫는다. 소설의 이 에피소드를 마케팅 관점으로 해석하면, 브랜드가 의도적으로 투사하는 '지각된 이미지'(Perception)와 제품이 가진 '본질적 실체'(Reality)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심연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 마케팅 역사는 브랜드가 내뿜는 이미지나 정서가 얼마나 기업이나 제품의 실체를 반영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을 담고 있다. (이미지=챗GPT 생성)
20세기 마케팅의 고전 : '지각의 사다리'
1980~90년대 매스미디어가 정보의 흐름을 독점하던 시대에 마케팅 전략가 잭 트라우트(Jack Trout)와 앨 리스(Al Ries)는 『포지셔닝(Positioning: The Battle for Your Mind)』(1981년)과 『마케팅 불변의 법칙(The 22 Immutable Laws of Marketing)』(1993년)을 통해 브랜드 경쟁을 제품이 아니라 소비자의 인식 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으로 규정하며 현대 브랜드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필립 코틀러 다음 세대 이론가인 이들은 "마케팅은 제품의 싸움이 아니라 지각의 싸움이다(Marketing is not a battle of products, it’s a battle of perceptions)"라고 강조했다.
당시의 마케팅은 소비자의 뇌리에 특정 지각을 심는, 말하자면 사다리 오르기 같은 과정이었다. 기업은 막대한 자본과 대량의 광고를 투입해 고객의 마음속에 '분홍색 드레스'라는 환상의 사다리를 놓았다. 일단 사다리의 꼭대기에 올라가 '우아'나 '혁신' 등의 키워드를 점유하면, 대체로 실체와 무관하게 시장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제학자 장하준이 말한 '사다리 걷어차기'가 마케팅에서도 가능했던 시대였다.
선점 브랜드는 지각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시장을 독점한 뒤, 후발 주자들이 실체(품질) 만으로 도전하지 못하도록 정보의 비대칭성이라는 벽을 세워놓고는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소비자는 기업이 입혀 놓은 옷(이미지)만을 볼 수 있었으며, 그 옷 아래의 피부(실체)를 확인할 창구는 철저히 차단돼 있었다.
브랜드 시그니처 : 분홍색
프루스트 소설의 미학 체계에서 '분홍색'은 대를 이어 전수되는 강력한 시그니처 컬러로 작동한다. 화자는 탄송빌의 정원에서 산사나무 울타리 너머 질베르트를 처음 마주할 때, 그녀를 둘러싼 '분홍색 산사꽃'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작은 할아버지 집에서 본 그 분홍색 옷의 여인을 떠올린다. 질베르트가 오데트의 딸이라는 실체를 인지하기 전에, '분홍색'이라는 시각적 기호가 두 인물을 하나의 브랜드 계보로 묶어버린 셈이다.
마케팅 관점에서 이 모습은 특정 시각적 모티프가 고객의 무의식 속에 어떻게 인식의 닻을 내리는지를 보여준다. 화자는 산사꽃의 분홍빛을 분홍색 실크 드레스로 연결지어 환상을 반복해서 소비한다. 분홍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실제 인간 오데트가 아니라 지각된 아우라로 인식하며, 산사꽃을 매개로 그 아우라를 새로운 대상인 질베르트에까지 투영한다. 일부 마케팅 강의에서는 실제로 프루스트 소설의 이 장면을 브랜드 포지셔닝 사례로 설명한다.
브랜드가 일관된 컬러 팔레트(브랜드의 시각적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 색상 조합)를 유지하는 이유를 소설의 이 장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고객은 구체적인 개별 제품의 품질과 특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브랜드가 내뿜은 정서를 기억하며 같은 브랜드 상품 전체의 일관된 본질이라 믿기 십상이다.
정보 투명성이 불러온 '사다리 걷어차기'의 종말
2000년대 이후 디지털 기술의 폭발과 정보의 민주화는 마케팅에 변화를 가져온다. 마케팅에서 '사다리 걷어차기'가 이전만큼 쉽지 않아진 것이다. 과거에는 지각의 사다리를 통해 올라간 뒤 사다리를 걷어차 실체를 은폐한 채 그 포지션을 지킬 수 있었으나, 이제 시장의 렌즈는 사다리 밑에만 머물지 않는다. 소비자는 기업의 '피부' 상태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수만개의 렌즈를 가지게 되었다.
SNS, 내부 고발, 커뮤니티의 집단 지성은 기업이 입은 '분홍색 드레스'의 솔기를 뜯어내 드레스를 샅샅이 분석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드레스를 벗겨낸 피부까지 공개한다. 이에 따라 마케팅 이론의 주류가 이제 포지셔닝에서 2007년 제임스 길모어(James H. Gilmore)와 조제프 파인(Joseph Pine II)이 주창한 진정성(Authenticity)으로 이동한다. 마케팅의 핵심은 "어떤 환상을 주입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의 실체가 우리가 말하는 환상과 일치하는가"를 끊임없이 증명하는 과정이 되었다. 사다리 위에서 홀로 진실을 독점하던 시대는 가고, 대중과 끊임없이 눈을 맞추며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진정성 또한 '지각된 진정성(Perceived Authenticity)'이라는 사실이다. 경험경제 이론을 제시한 파인과 길모어는 그들의 저서 『진정성 Authenticity: What Consumers Really Want』(2007년)에서 진정성이 나타나는 다섯 가지 유형—Natural, Original, Exceptional, Referential, Influential—을 제시했다. 자연성에서 비롯되는 진정성, 기원과 전통에서 오는 진정성, 뛰어난 장인정신과 품질에서 오는 진정성, 문화적 상징이나 전통을 참조하는 진정성,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을 통해 드러나는 진정성이 그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소비자가 진정성을 판단할 때 "그것이 스스로에게 충실한가(Is it true to itself?)"와 "그것이 말한 대로의 존재인가(Is it what it claims to be?)"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정성은 흔히 브랜드의 내부 정체성에 대한 충실성(내부 기준)과 외부로 표명한 약속과 실제 경험의 일치(외부 기준)라는 두 차원에서 이해돼 이후 실용적으로 '자기 참조적 진정성(Self-referential, Is the offering true to itself?)'과 '타자 참조적 진정성(Other-referential, Is the offering what it says it is?)'으로 정리됐다.
'자기 참조적 진정성'은 브랜드의 기원, 역사, 유산 등 내적인 본질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묻는다. 브랜드의 '영혼'이나 'DNA'가 흔들리지 않는지에 관한 기준이다. '타자 참조적 진정성'은 브랜드가 외부로 공표한 약속, 광고, 이미지가 실제 경험과 일치하는가를 묻는다.
현대 마케팅에서 핵심 축은 아무래도 후자의 진정성일 수밖에 없다. 마케팅은 본질적으로 시장을 향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진 브랜드라 할지라도, 대중에게 내뱉은 말(환상)과 실제 보여주는 모습(실체)이 어긋나는 순간 대중은 가짜(Fake)라고 판정한다. 정보가 투명해진 시대에 소비자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위를 빼꼼히 바라보며 던지는 질문은 "당신은 당신이 말하는 그 존재가 맞는가?"이며, 기업이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곧 현대의 브랜딩이다.
그러므로 표출과 표현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진정성은 숨겨진 미덕이 아니라, 드러나는 양식이다. 기업이 표방하는 가치가 제품의 디테일, 고객 응대, 광고의 톤앤매너에서 일관되게 표출돼 '타자 참조적 일관성'을 획득할 때 소비자는 비로소 진정성을 지각한다. 소비자는 기업의 말을 믿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믿는다. 따라서 진정성 마케팅은 "우리는 진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사다리 구석구석을 훑어볼 때 어디에서도 균열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증거의 구조물을 설계하는 일이 된다.
현대 마케팅의 승자는 가장 멋진 환상을 만든 자가 아니라, 그 환상이 실체임을 가장 설득력 있게 경험시킨 자이다. 진정성은 본질의 문제인 동시에, 그 본질을 어떻게 투명하게 노출하고 공감 가능한 방식으로 소통하느냐는 '지각의 관리'가 된다. 당연히 진정성이란 것이 기업의 순수한 의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체와 표현 사이의 간극이 제로에 수렴한다는 것을 소비자가 직접 경험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그리하여 종국에 실체가 다시 핵심이 된다. 가짜를 진짜로 표현하는 일은 너무 고단하고 결정적으로 오래 지속할 수 없는 기술이니까. 관건은 그 실체가 내내 지각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대 불일치 이론과 신뢰의 붕괴
프루스트 소설에서 환상은 지속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그 황홀한 만남의 기억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 소설에선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하지만 사실, 만약 누군가가 그 분홍색 옷의 여인이 다름 아닌 스완 부인이라고 내게 말해주었더라면, 나는 무척이나 놀랐을 것이다. (...) 그녀는 내가 알던 그 무엇과도 너무나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Mais, à vrai dire, si l’on m’avait dit que cette dame n’était autre que Mme Swann, j’aurais été bien étonné. (...) elle était pour moi quelque chose de si différent de tout ce que je connaissais.)"
— Marcel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Tome I, Du côté de chez Swann, Gallimard,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87, p. 78.
훗날 그 여인의 실체가 화류계에서 이름을 날린 밑바닥 여성이었음을 깨닫고 소설의 화자가 느낀 이 허망함을 경영학 관점으론 리처드 올리버(Richard Oliver)의 '기대 불일치 이론(Expectancy Disconfirmation Theory)(1980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고객의 만족은 절대적 성능 혹은 품질에 좌우되지 않는다. 구매 전 형성된 기대치와 구매 후 겪은 실제 성과 사이의 차이, 즉 불일치(Disconfirmation)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기업이 '분홍색 드레스'를 통해 과도하게 높은 기대치를 형성했다면(Positive Expectancy), 실제 성과가 조금이라도 그에 미치지 못할 때 소비자들은 '부정적 불일치(Negative Disconfirmation)'를 경험하며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다. 프루스트의 화자가 경험한 것처럼 그 간극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브랜드는 신뢰라는 가장 큰 자산을 상실하며 회복 불가능한 결말로 치달을 위기에 처한다.
그래도 환상은 필요하다
그렇다면 진정성의 시대엔 마케팅에서 환상은 폐기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 환상은 진정성 있는 환상이어야 한다.
진정성 있는 환상은 마케팅 대행사의 세련된 기획안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업의 창업 정신, 즉 '피부'의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DNA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파타고니아가 제시한 지구를 구한다는 '환상'에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창업자 이본 쉬나드의 암벽 등반가 시절부터 이어진 환경 보전에 관한 올곧은 투쟁의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회의실이 아닌 창업의 영혼에서 발원한 환상이다.
진정성 있는 환상을 위해선 마케팅 내러티브 뒤에 촘촘한 입증의 그물망을 짜여 한다. 브랜드가 내세우는 신화를 구체적인 행동과 제품력으로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입증은 실패한다. 2004년부터 리얼 뷰티를 말한 도브(Dove)는 광고 문구만 바꾼 것이 아니라 자존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모델 기용 원칙을 명문화하는 등 실천적 증거를 겹겹이 쌓아 올렸다. 입증되지 않은 신화는 언젠가 탄로 날 기만일 뿐이다.
언제나는 아니지만 때로 취약성의 공유가 진정성 있는 환상을 일으켜 세운다. 신(神)이 운영하는 기업은 없다. 기업도 소비자도 인간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분투는 공감을 불러올 수 있다. 나이키의 진화는 분투의 대표적 사례다. 과거의 나이키가 마이클 조던을 통해 초인적 영웅의 환상을 팔았다면, 21세기의 나이키는 취약성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환상을 이어갔다. 1990년대 아동 노동 착취 파문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나이키의 초기 대응은 방어적이었지만, 많은 비판에 직면한 후 개혁을 시작했다. 과오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개선 과정을 공유하는 말하자면 취약성의 노출을 선택한 것이다. 21세기 기업이 소비자에게 소구하는 환상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적 분투의 서사일 수도 있다. 브랜드가 자신의 취약점이나 과거의 실수를 솔직히 공유하고 무엇보다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일 때, 기만의 나락에서 벗어난 환상은 공감의 영역으로 비상한다.
기업이 사회적 논쟁의 위험을 감수하며 진정성을 어떻게 구축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인 나이키의 광고 캠페인 'Dream Crazy'. (사진=나이키)
진정성의 렌더링
마케팅 교과서에서 취약성 공유 사례로 등장하는 나이키는 '진정성의 렌더링'으로도 유명하다. 2018년 나이키는 자사의 대표 슬로건 'Just Do It' 탄생 30주년을 기념해 광고 캠페인 'Dream Crazy'를 공개했다. 이 캠페인은 스포츠 광고를 넘어, 현대 브랜드 전략에서 기업이 사회적 논쟁의 위험을 감수하며 진정성을 어떻게 구축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이 캠페인의 중심 인물은 전 NFL(미국 프로풋볼) 쿼터백 콜린 캐퍼닉(Colin Kaepernick)이었다. 캐퍼닉은 2016년 NFL 시즌 내내 미국 국가 연주 때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통해 인종 차별과 경찰 폭력에 항의하여 미국 사회에서 큰 정치적 논쟁을 촉발한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격렬한 찬반 논쟁을 낳았고, 그는 이후 사실상 리그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나이키는 이러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캐퍼닉의 얼굴을 흑백 클로즈업 이미지로 제시하며 다음과 같은 문구를 광고의 핵심 메시지로 내세웠다.
"무언가를 믿어라. 설령 그것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일지라도(Believe in something. Even if it means sacrificing everything)."
광고가 공개되자 미국 사회는 즉각 양분됐다. 일부 보수층 소비자들은 나이키 제품을 불태우거나 로고를 훼손하는 영상을 SNS에 올리며 불매 운동을 벌였다. 캠페인 직후 나이키 주가가 단기적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브랜드 충성도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특히 나이키의 핵심 소비층인 젊은 세대와 도시 소비자층은 브랜드의 가치 선언에 강하게 공감했다. 시장 분석에 따르면 캠페인 공개 직후 나이키의 온라인 매출은 약 30% 증가했으며, 주가는 이후 빠르게 반등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마케팅 이론의 관점에서 이 사례는 브랜드가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진정성을 구축하는 과정, 즉 '진정성의 렌더링(rendering of authenticity)'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경험경제와 진정성 전략을 제시한 길모어와 파인은 소비자가 실제 진실보다 '지각된 진정성(perceived authenticity)'에 반응한다고 설명한다. 나이키는 완벽한 기업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하기보다, 사회적 갈등 속에서 비판을 감수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이 소비자에게 브랜드의 진정성을 실감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Dream Crazy' 캠페인은 현대 브랜드 전략에서 가치 선언과 위험 감수가 어떻게 진정성으로 지각되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로 남게 됐다.
피부와 옷의 경영학
21세기 경영의 핵심은 '얼마나 멋진 분홍색 옷을 입힐 것인가'가 아니라, '입고 있는 옷이 우리의 피부와 얼마나 잘 맞는가'를 증명하는 데 있다. 여기서 '옷'은 기업의 마케팅 이미지(기표)를, '피부'는 기업의 실제 문화와 철학(기의)이라고 할 수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Victoria’s Secret)'은 '오버 프라미싱(Over-promising)'의 비극적 전형이다. 그들은 '엔젤'이라는 초현실적인 모델을 통해 환상적인 이미지를 고수했다. 그러나 현대 소비자들이 다양성이라는 진실을 요구하고, SNS를 통해 모델들의 실제 고충과 기업 내부의 보수성이 폭로되자 그 화려한 날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2019년 패션쇼 취소와 2021년 '엔젤' 브랜드 폐지는 지각(완벽한 엔젤)과 진실(현실의 여성)의 간극이 너무 벌어진 결과였으며, 빅토리아 시크릿의 브랜드 이미지 실추와 모회사의 시가총액 급락으로 이어졌다.
피터 드러커는 "마케팅의 목적은 고객을 잘 알고 이해해서 제품이나 서비스가 고객에게 딱 맞아 저절로 팔리게 하는 것(The aim of marketing is to know and understand the customer so well that the product or service fits him and sells itself)"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딱 맞다"는 것은 지각과 실체의 완벽한 일치를 의미한다. 이 일치가 확보될 때 고객은 비로소 그 브랜드에 영혼이 있다고 느낀다. 이 과업의 성공을 위해 경영자는 마케팅 기술자가 아닌 자기 성찰을 하는 예술가가 돼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안치용의 Critique : 기표를 기의에 붙들어 매는 시대]
프루스트 소설의 어린 화자에게 분홍색 옷의 여인은 말하자면 모종의 종교적 숭배 대상과 흡사했으나, 진실이 드러난 순간 그녀는 기만적인 장식으로 전락한다. 언어학자 소쉬르의 개념을 빌리자면, 20세기 마케팅은 '분홍색 드레스'라는 기표를 '고귀함'이라는 기의와 마음대로 연결해 세상을 현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보가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오늘날, 떠도는 기표는 반드시 그 실체인 기의의 자리에 단단히 닻을 내려야 한다.
언어학의 지평이 아니어도 기표와 기의의 완벽한 일치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경영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언제나 실체보다 앞서 나가기 때문이다. 이 어긋남이 마케팅의 숙명적 조건이라면, 경영자의 통찰은 그 어긋남의 공간을 기만이 아닌 지향으로 채우는 데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마케팅의 품격은 피부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분홍색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피부가 뿜어내는 생명력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진실된 예복을 고르는 데 있다. 환상을 깨뜨린 뒤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진실의 힘. 그 진실의 환상이 바로 프루스트의 시간이 우리에게 전하는 미래 경영의 서사다.
안치용 ESG비즈니스리뷰 발행인 겸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충범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