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마라오 드라기 유럽 중앙은행(ECB) 총재의 입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CB가 이번 통화정책 회의에서 ‘경기침체(디플레이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사상 최저치의 기준금리를 또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신흥국 시장 불안으로 유로화에 자금이 몰리면서 수출 경쟁력이 저하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 터라 금리 인하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일각에서는 디플레를 확실히 예방하기 위해 예금금리를 마이너스수준으로 낮추는 한편 미 연방준비제도(Fed)식 자산매입 또한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주택시장과 제조업이 호전되는 등 경기 회복세가 눈에 띄고 있다며 서둘러 행동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의견 또한 적지 않다.
◇유로존 물가 ‘바닥’..“ECB, 기준금리 내릴 것”
5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오는 6일에 열리는 ECB 통화정책 회의를 앞두고 기준 금리 인하 등의 부양책이 단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유로존의 물가상승률이 ECB 목표치 2%의 절반에도 못 미쳐 디플레 불안이 급증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 1월 유럽연합(EU) 통계청인 유로스타트는 유로존의 1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대비 0.7%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시장 예상치인 0.9%에도 밑도는 수치다.
유로존 CPI는 지난 10월과 11월 각각 0.7%, 0.9%를 찍고 12월 들어 0.8%로 약간 밀리더니 1월에 와 0.7%로 꼬꾸라졌다. 지난 1월까지 4개월 연속으로 1% 미만의 CPI 상승률을 이어간 것이다.
◇최근 3년간 물가 상승률 추이 (자료=유로스타트 홈페이지)
물가 상승률이 하락 행진하는 동안 ECB는 경기 부양을 위해 언제든 행동에 나서겠다며 시장을 달래는 한편 기준 금리를 신속하게 낮추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해 5월2일 ECB는 0.75%의 기준금리를 0.5%로 인하한 후 디플레가 발생할 낌새가 느껴지자 지난 11월에는 0.25%로 또 한 번 금리를 낮췄다. 이는 역대 최저치며 현재까지도 그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지난 1월 CPI 지수가 오르기는커녕 떨어지자 ECB가 기준 금리를 한번 더 낮출 것이라는 견해에 힘이 실렸다.
토마스 하제스 바클레이즈 이코노미스트는 “ECB는 기준금리를 0.15%포인트 내린 0.1%에 맞출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빈더 시안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금리 전략가도 “기준 금리는 0.1%포인트 내려갈 것”이라며 “금리 인하 결정이 내려지지 않더라도 드라기 총재가 공격적인 부양책을 시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단스케 방크와 BNP파리바 또한 금리 인하 전망을 잇따라 내놨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자산매입 규모를 점진적으로 줄이는 ‘테이퍼링’에 나선 것을 계기로 신흥국을 이탈한 자금이 유로화에 쏠릴 수 있다는 점도 금리 인하 가능성을 높였다.
주요 통화대비 유로화가 강세를 나타내면 유럽 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저하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ECB는 금리 인하 등의 간접적인 방식으로 돈을 풀어 유로화 가치를 낮출 수 있다.
BNP파리바는 유로존 부채 우려가 거의 사라지고 경상수지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유로화가 안전자산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야닉 노 스터전 캐피털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신흥국 시장에 혼란이 확산된 반면 유로존은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유로존 자산에 대한 투자가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디플레 방지 카드 '다양'..미국식 자산매입·마이너스 예금금리
기준 금리 인하에도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추가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물가 목표치인 2%를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란 이유에서다.
많은 기관이 ECB에 과감한 부양책을 주문하고 있다. BNP파리바는 지난해부터 줄기차게 미국식 양적완화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매달 500억유로 규모의 유로존 국채를 직접 매입하는 식으로 유동성을 확대해야 디플레 위기감을 깔끔히 털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해 이날 ECB가 미국과 일본 중앙은행이 단행했던 식의 자산매입에 나설 수 있다고 보도했다.
ECB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집행위원회 중 한 명인 피터 프래트도 자산매입을 비롯한 다양한 부양 카드를 사용하는 데 동의하고 있다.
피터 프래트는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산매입과 마이너스 예금금리 등 인플레 목표치에 접근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동원해야 할 것”이라며 “목표를 이루기 어려울 때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ECB 규정에 회원국 국채를 직접 매입하는 항목이 없는데다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이 자산매입을 매우 꺼리고 있어 미국식 양적완화가 도입될지는 불투명하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경험 한 바 있는 독일은 유동성을 직접 제공하는 방식에 강한 반감을 품고 있다.
제로 수준의 예금금리를 또 한 번 낮추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마이너스 예금금리 도입은 양적완화 보다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은 조처다. 은행에 묵혀둔 돈이 많은 예금자의 반발을 살 수 있으나, 대출을 늘려 시중의 유동성을 늘릴 수 있다.
지난해 말 비토르 콘스탄치오 ECB 부총재는 “당장은 아니지만, 상황이 더 악화되면 마이너스 예금금리를 시행할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바클레이즈는 ECB가 예금금리를 낮춘다면 현재의 0%에서 0.1%포인트 낮춘 -0.1%를 적용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난 2012년 덴마크가 이 마이너스 예금금리를 도입한 바 있다.
채권 불태 도입도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이날 ECB가 금리 인하 대신 채권 불태화(不兌化·Sterilisation)를 중단하는 식으로 유동성을 키울 수 있다고 보도했다.
채권 불태화는 중앙은행이 채권매입액과 같은 양의 유동성자금을 흡수해 통화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조치를 중단하면 시중에 통화량이 늘면서 양적완화 같은 효과가 난다.
전문가들은 이 방식으로 시중에 1750억유로를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단골 손님처럼 회의를 앞두고 등장하는 저금리장기대출(LTRO) 또한 단행될 수 있다. 이미 유로존 은행들은 2011년 말과 2012년 초 사이에 LTRO를 통해 ECB로부터 1조유로를 빌린 경험이 있다.
◇금리 인상 시기상조.."거시경제 회복되고 있다"
기준 금리 인하를 포함한 어떠한 부양책도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기준 금리 동결을 주장하는 측은 경기침체를 우려할 만큼 유로존 경제가 허약하지 않다고 본다.
실제로 유로존의 민간 경기는 31개월래 가장 빠른 속도의 확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날 시장조사업체 마르키트는 서비스업과 제조업을 합한 유로존의 1월 복합구매관리자지수(PMI)가 52.9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2011년 6월 이후 최고치다.
특히, 유로존 경기 회복의 골칫덩이였던 재정 위기국들이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경기 상승 예감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난달 그리스의 제조업 PMI는 51.2로 65개월 이후 최고점을 찍었다. 그리스가 경기 확장을 뜻하는 50선을 넘어선 것은 지난 2009년 8월 이후 처음이다. 스페인의 1월 유로존 제조업 PMI는 52.2로 45개월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스위스 금융그룹 UBS는 유로존 PMI가 호전된데다 자금 시장도 안정단계로 접어들었다며 ECB가 기준 금리를 동결할 것으로 점쳤다.
집값 상승세도 두드러진다.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유로존의 지난해 3분기 주택가격은 전 분기 대비 0.6% 상승했다. 전 분기에 이어 두 분기 연속 상승세를 이어간 것이다. 특히, 아일랜드와 스페인은 각각 4.1%, 0.8%씩 올랐다.
이처럼 물가 하락 압력을 상쇄할 만한 경기 호조가 눈에 띄자 일부 전문가들은 기준금리 인하 결정이 미뤄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JP모건은 ECB가 당분간 현행 기준금리를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유로존의 거시경제가 살아나는 가운데 시장의 변동성 또한 완화되는 추세라는 점에서다.
산드라 홀즈워스 케임스캐피털 채권투자매니저 또한 금리 동결 쪽에 손을 들었다. 홀즈워스는 “이미 유로존의 기준금리는 충분히 낮다”며 “다만, 유동성이 줄어들 것이란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과감한 정책 도입 가능성을 언급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울러 닉 헤이스 AXA 인베스트먼트 매니저스 선임 펀드 매니저는 “디플레 우려가 높아지고 있지만, ECB가 당장 행동에서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며 “각국 정부가 부채를 상환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정도로 경기가 호전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빨라야 다음 달쯤 금리 인하가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ECB가 그때 발표되는 거시경제전망 보고서와 물가상승률 전망을 참고한 뒤 정책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란 분석이다.
킴벌리 마틴 뉴질랜드 은행(BNZ) 외환 전략가는 "ECB가 오는 3월까지 기다렸다가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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