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애신기자] 기업들이 스펙이 아닌 사람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원자의 능력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어 만들어 놓은 영어점수 등의 스펙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변질됐다는 반성에서다.
무엇보다 기업들은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고스펙자=우수 사원'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기업들에서 '탈스펙'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배경이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올 상반기 신입 채용 계획이 있는 기업 285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절반 가까운 44.2%가 스펙중심 채용에서 벗어나도록 변화를 줄 예정이다.
실무면접 비중을 강화하고 자격조건 없는 완전 열린채용 도입, 인성면접 비중 강화, 자격조건 일부 폐지 등 기준 완화가 대표적이다.
잡코리아 좋은일연구소 조사 결과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기업들은 올해 상반기 공채 합격 키워드로 ▲스펙초월 ▲도전정신 ▲직무역량 ▲인문학 ▲면접강화 등을 제시했다.
다시말해, 높은 수준의 스펙이 직무능력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업들이 깨달으면서 탈스펙 채용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중견기업 한 관계자는 "회사 설립 초반에는 고스펙자 위주로 채용했는데 각종 부작용이 속출했다"며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는 진짜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을 뽑기 위해 직무 경험이 많은 사람을 위주로 찾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사람을 뽑다보니 사고 방식이 같고 생각하는 틀도 비슷했다"며 "모두가 A를 제시할 때 B나 C를 들고 나올 사람이 필요해 채용을 다양화했다"고 설명했다.
◇"스펙은 조건, 남는 건 경험"
서점가에는 취업에 대한 각종 조언을 담은 책들이 즐비하다. 몇 년 전에 나온 서적들만 해도 '기업 공채를 준비하려는 사람들은 이런 자격증을 따라, 어학연수를 통해 영어능력을 키워라' 등의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나온 책들은 사뭇 다르다. 지난해 스펙 파괴가 취업시장 주요 키워드로 부각됐기 때문이다.
특정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충족해야 할 조건을 담기보다는 스펙이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라든지, 인사담당자들은 스펙에 무감각하다 등의 메시지를 던지며 취업준비생들에게 견문을 넓히거나 경험을 쌓으라고 권하고 있다.
◇서점가에 즐비한 취업 관련 서적들(사진=뉴스토마토)
이 대목에서 취업준비생들이 가지는 의문 하나. 경험도 좋고 다 좋은데 어찌됐건 첫 관문인 서류 전형을 통과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저질' 스펙을 가졌음에도 대기업 유통기업에 합격한 조모씨(35·남)는 이에 대한 해법을 조심스레 제시했다.
조씨는 "스펙이라고는 학점이 3.3을 넘는 거 빼면 이력서에 쓸 게 없었다"면서도 "남들이 학원에서 토익과 씨름하고 도서관에서 자격증 공부를 할 때 열심히 움직인 덕에 남들보다 월등한 경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대학생시절부터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받아와서 국내에 판매하는 일을 취미삼아 해왔다. 해당 업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그에 대한 입소문이 퍼졌고, 이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경험을 쌓으라는 게 뻔하디 뻔한 말 같지만 빵빵하게 스펙을 쌓는 것보다 덜 진부하다"며 "몸으로 부딪히면서 실제로 경력을 쌓는 게 대기업 인턴이나 프로젝트만 있는 게 아닌만큼 시야를 넓히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기업 한 관계자는 "사람이다보니 구직자들의 서류를 일일이 검토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더 피로감이 높은 건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기 때문"이라며 "이력서에 특이한 내용을 채우려하지 말고 특정 분야에 대한 관심을 볼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이면 충분하다"고 귀띔했다.
◇획일적 방식 탈피..채용 다양화 '붐'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채용을 유지하고 있는 대기업들도 열린채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류-필기-면접-신체검사 등 전형적인 채용단계를 거치지 않고 파격 채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학점 3.0 이상만 충족하면 삼성직무적성검사(SSAT)에 응시할 수 있게 했다. 보통 서류에 명시된 스펙이나 여러 조건에 따라 1차적으로 인재를 선별한 후 시험을 보게 하지만 삼성은 서류전형이라는 문턱을 없앴다.
현대차(005380)는 '더 에이치'(The H)를 통해 인재를 직접 찾아 나서 캐스팅한 뒤 4개월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인성을 평가해 최종 신입사원을 선발하고 있다.
SK(003600)그룹은 '바이킹 챌린지'로 인재를 채용한다. 개인 오디션을 진행해 예선을 통과한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합숙을 진행한다. 미션을 수행하는 능력을 보고 최종 합격자를 선발한다. 학교·성별·나이·학점·어학점수 등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게 특징이다.
◇삼성그룹·현대차그룹·SK그룹·LG 본사 전경.(사진=각사)
LG(003550)도 '글로벌첼린저'를 통해 해외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2주간 활동을 심사해 장학금과 LG 계열사 입사 특전 또는 인턴자격을 부여한다.
KT(030200)는 좀 더 파격적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레 스타 오디션'을 진행, 5분안에 PPT를 통해 오디션이라는 자유로운 형식으로 자기 PR을 하고 합격자에게는 서류전형을 면제해줬다.
또 SPC그룹은 아르바이트생 중 일부를 대상으로 역량을 평가한 후 10%를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있다.
애플리케이션 성능 관리기업인 제니퍼소프트는 이름·성별·나이·연락처 정보만 기재한 서류를 기반으로 채용하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마케터를 모집할 때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내 재능과 경험에 대한 비평과 발산'에 대한 논술로 서류전형을 갈음한 후 인터뷰와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채용했다.
공기업에서도 열린채용 붐이 일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학력과 나이 제한을 폐지한 대신 토익점수만 제한을 뒀다. 남부발전과 서부발전은 지원서에 학교와 전공·학점·토익·자격증 등 입력란을 삭제했다. 지원자 전원에게 시험 응시 기회를 부여할 계획이다.
관건은 이 같은 열린채용이 일시적인 붐으로 끝날 것인지, 채용 다양화의 일환으로 자리잡을 것인지다.
일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스펙 타파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눈 밖에 나지 않으려 경쟁적으로 특이한 채용방식을 도입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종의 '보여주기식' 겉치레라는 것이다.
M기업의 한 관계자는 "8대 스펙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기존 채용 방식에 부작용이 생기자 지난해 기업들이 유례없이 채용을 다양화했다"며 "하지만 이 역시 또 다른 부작용이 있어 열린채용을 유지할지 미지수"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채용방식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어떻게 뽑든지 간에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한 곳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D기업 인사 담당자는 "기업이 원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며 "조직에 잘 융화되면서 열정이 있고 본인이 맡은 업무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있으면 된다"고 조언했다.
L기업 관계자는 "모든 스펙을 전부 갖추는 건 무의미할 뿐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며 "하고 싶은 직무, 그리고 입사하고 싶은 회사와 관련된 경험을 많이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계속>
<뉴스토마토는 오는 18일 서울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미래 인재 컨퍼런스 2014'를 개최합니다. 우리사회 일자리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한편 미래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상을 제시하는 논의의 장이 될 것입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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