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포르투갈 에스피리토 산토 인터내셔널(ESI)의 회계 부정이 드러나자 세계 증시와 채권 시장이 엄청난 혼돈 속에 빠졌다.
종료된 줄 알았던 유로존 위기 불안이 다시금 불거지면서 지난 2009년에 유럽 재정위기의 악몽마저 떠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포르투갈 은행에서 출발한 은행 위기가 유럽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포르투갈 은행 회계 부정 소식..세계 금융권 '패닉'
10일(현지시간) USA투데이는 포르투갈의 금융불안이 고조된 여파로 자국은 물론 세계 금융 시장이 흔들렸다고 보도했다.
포르투갈의 최대 은행인 방코에스피리토산토(BES)의 지주회사인 에스피리토 산토 인터내셔널(ESI)이 단기 부채 상환에 실패한 사실이 드러나자 은행권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급증한 것이다.
지난 5월 감사에서 13억유로에 이르는 회계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발각돼 이 같은 불안감을 키웠다.
이처럼 ESI 회계 부정 사건을 계기로 유럽 금융 시장의 취약성이 부각되자 세계 금융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증시는 이날 4% 넘게 급락했고 BES의 주가는 장 중 17%나 곤두박질쳤다.
유럽 증시도 일제히 하락했는데, 범유럽 지수인 Stoxx 50 지수는 1.65% 하락한 3150.22를 기록했다. 미국과 아시아 증시도 덩달아 내림세를 보였다.
이런 가운데 포르투갈 10년물 국채는 이날 한때 0.2%포인트 오르며 4%를 넘어섰고 그리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국채 금리도 일제히 상승했다.
반면 안전자산인 금과 일부 채권에 자금이 몰리기 시작했다. 은행 위기로 위축된 투자자들이 허둥지둥 미국과 독일 국채, 금 등의 안전자산을 사들인 것이다. 특히 이날 독일 10년물 국채금리는 1.17%나 하락해 2013년 5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포르투갈 경제 부담 '가중'..IMF "금융 시스템에 허점 있어"
은행 위기가 아니어도 가뜩이나 어려운 포르투갈 경제에 너무 큰 짐이 지워졌다.
포르투갈의 공공부채는 지난 3년간 국내총생산(GDP) 대비 94%에서 129%로 늘었다. 이는 매우 불안정한 수준이다.
포르투갈 증시는 지난 4월 이후 무려 22%나 내렸다.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주가 하락은 부진한 경기를 의미한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5~7월10일 포르투갈 증시 추이 (자료=트레이딩이코노믹스)
포르투갈이 구제금융을 너무 빨리 졸업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포르투갈이 구제금융을 졸업하지 않았다면 유럽중앙은행(ECB)의 신속한 자금 지원을 받았을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포르투갈은 지난 2011년 5월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등 트로이카와 780억유로의 구제금융안에 합의했고 지난 5월 3년 만에 구제금융을 졸업했다.
구조개혁을 통해 재정적자를 많이 줄인 데다 은행권의 자기자본비율 또한 높이면서 정부가 자신감을 회복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포르투갈 통계청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재정적자 비율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4.9%로 하락했다. 지난 2012년의 6.4%에서 1.5%포인트나 개선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포르투갈은 ECB가 제공하는 무제한 국채매입 프로그램(OMT)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됐다. 너무 섣부르게 구제금융을 벗어났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생겼다.
상황이 악화되자 이날 국제통화기금(IMF)은 성명을 내고 "포르투갈에 위기 해결 능력이 있다고 본다"며 "그러나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금융 시스템에 여전히 허점이 있다"고 밝혔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이날 ESI의 자회사인 에스피리토 산토 파이낸셜그룹(ESFG)의 신용등급을 'B2'에서 'Caa2'로 하향 조정했다.
◇EU 은행권 신뢰 '상실'..세계 경제도 안심 못해
더 큰 문제는 투자자들이 BES의 회계 부정 사건을 계기로 유럽연합(EU) 내 은행들에 대한 신뢰를 한꺼번에 상실했다는 점이다.
포르투갈의 유명 은행도 법망을 피해 비리를 저질렀는데, 다른 중소 은행들이야 더 볼 것도 없다는 것이다. 유럽 은행들은 졸지에 악성 부채를 숨겨놓거나 재무제표를 조작했다는 의심을 받게 됐다.
전문가들은 이런 의심은 차치하고 사실관계만 놓고 봐도 그동안 유럽 은행권이 금융 시스템 개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신을 차리고 은행 체질 개선에 나선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대형 은행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자산 건전성 심사를 단행해 왔다. 미국 은행들은 정부와 호흡을 맞춰 자기 자본 비율을 늘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 유럽 은행들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주도하는 자산 건전성 평가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미국 은행보다 자기 자본 보유량이 적은 편이다. 은행 재정의 투명성도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쯤 되자 키프로스 은행위기로 유럽 전체가 혼돈에 빠졌던 쓰라린 기억과 지난 2009년에 유럽 재정위기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투자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포르투갈 은행 위기가 아니다. 이들은 유럽 경제를 이끌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의 대형은행들도 위기에 처할까 우려하고 있다.
역내 은행권 전반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 유럽을 찾았던 투자자들이 다른 곳으로 자금을 옮길 수 있다. 영국의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유럽 증시에 4500억유로, 채권에 2300억유로를 투자했던 큰손들이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나아가 유로존 1, 2위국인 독일과 프랑스가 흔들리면 유럽은 물론 세계 경제도 엄청난 불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1974년 당시 독일 헤르슈타트은행이 파산하면서 국제적인 위기를 조장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포르투갈 은행 사태로 '21세기 뱅크런'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포르투갈 자체 경제 상황과 외부 변수를 고려했을 때 은행 위기 사태가 다른 나라에까지 확산되지 않을 것이란 주장 또한 만만치 않았다.
포르투갈은 지난 4월 무디스로부터 국가신용등급 상향 조정 평가를 받을 정도로 재정적자를 줄였다. 게다가 ECB가 조만간 장기대출프로그램(LTRO)을 통해 유로존 은행에 자금을 지원할 계획이라 포르투갈 경기 침체에 따른 글로벌 경기 하강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미쓰비시 UFJ증권의 토머스 로스 디렉터는 "유로존이 경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지만, 이런 전망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며 "시장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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