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과거사 갈등, 정부 당국간 외교로는 해결 못해”
전문가들, '양국 시민사회가 평화·과거사 문제 병행해 풀어야' 한목소리
광복 7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동아시아 지배 '강대국 논리' 분석
2015-08-16 10:40:45 2015-08-16 10:40:45
“일본이 ‘과거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그 사실을 무시한 채 일본에 사과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 박정희가 1961년 11월 국가원수 자격으로 처음 일본에 가서 만난 사람은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전 총리)였다. 그 자리에는 (박정희가 다닌) 만주군관학교 교장이었던 사람이 특별 초청됐다. 과거 일본군 중위였던 박정희가 국가원수가 된 한국을,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겠나?”
 
대표적인 한국 현대사 학자인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토론에는 날이 서 있었다. 지난 12일 한반도평화포럼과 노무현재단 등이 공동 주최해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에서 서중석 교수는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일본의 진보적 시민사회마저 과거사 문제를 외면하는 이유 중에는 ‘한국의 문제’도 있음을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 18년간 일본에는 친한파와 반한파가 있었다. 친한파는 만주와 중국을 침략한 기시 노부스케를 선두로 한 만주인맥이었고, 반한파는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고 김대중 구출운동과 김지하 석방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한국의 신문들이 공공연하게 그런 식으로 구분했다. 역사가 어떻게 돼가는 것인가? 우리가 이런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존중하겠다는 생각을 하겠나?”
 
물론 전적으로 한국 탓만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서중석 교수는 일본이 과거사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기본적인 이유는 미국의 ‘냉전 정치’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2차 대전 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이 일본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 교수는 “미국은 일본의 천황제를 존속시키고 기시 같은 전쟁 전의 지배세력이 전후에도 지배 세력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했다”며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시민사회도 과거사를 반성할 필요가 없게 됐고 유럽의 ‘68혁명’이나 미국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같은 성찰의 기회도 갖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서 교수는 “최근 ‘신냉전 시대’를 맞이해서도 미국은 중국과 대항하기 위해 일본을 끌어들이려고 과거사 등 모든 것을 외면하고 일본과 긴밀히 협력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주제발표를 맡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이전부터 현재까지 동아시아에서는 강대국들의 논리가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다”며 서 교수와 같은 맥락의 분석을 내놨다. 박 교수는 한국과 일본 모두 ‘현상유지’를 원하는 보수적인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지금도 강대국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두 나라의 시민사회가 주도해 강대국의 논리에 편승하지 않는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는 “한일관계에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한·일 관계나 한·중 관계에서 정부의 외교에 기대할 것이 없다. 아무 것도 못한다. 정부 당국끼리 못 하는 일을 시민사회가 할 수 있다”고 거들었다. 노무현재단의 이해찬 이사장(전 국무총리)은 최근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해 법률 제·개정을 밀어붙이고 있는 아베 내각에 반대하는 시위에 일본의 고등학생들까지 나서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며 “정부로부터 독립된 외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중석 교수는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가 중요하지만 과거사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의식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며 “과거사 문제와 평화운동을 병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 교수는 “절대 다수의 일본 사람들이 과거사 문제를 외면하고 있지만 일본 시민사회에는 평화운동의 전통이 강하다”며 “평화헌법 9조(일본의 교전권을 부정한 헌법 조항) 지키기 운동을 해왔고 최근 집단자위권 법안 반대운동을 하는 세력과 평화운동을 같이 하면서 과거사 문제를 적절히 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동북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본격화하면서 주변 강대국들의 논리에 흔들렸던 19세기 말 한반도의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의 “속국 근성”부터 버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대중평화센터의 정세현 부이사장(전 통일부 장관)은 “19세기 말 정치지도자들이 우리의 일을 청나라, 일본, 러시아에 물어봤던 모습이 해방 이후 외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며 “특히 남·북 대화를 할 때도 미국에게 물어보는 식으로 미국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본다”고 비판했다. 정 부이사장은 “일본 민주당 소속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를 두고 일본 외무성 전·현직 관료들이 ‘미국에서 벗어나는 외교를 하겠다는 사람을 총리로 둘 것이냐’는 식으로 미국과 내통한 결과 (2010년) 하토야마 내각이 무너졌다”며 “한국에는 일본보다 더한 외교관들이 있는 것은 물론 대외 굴종적 외교를 당연시하는 정치인들이 있어 암울하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9월 3일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날 토론회 연사로 나선 모든 이들이 ‘참석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영희 대기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중국에 러브콜을 보내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한국이 외교적 외톨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참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
 
 
일본 집권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15일 2차 대전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이날은 아베 내각의 현직 각료 3명과 '다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에 소속된 여야 의원 66명이 참배에 동참했다. 사진/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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