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전환 계기, ‘속도조절’ 강조하다 실기 우려
대북 신호 벌써부터 혼란…‘대화 모멘텀’ 또 놓칠 수 있어
“김정은 ‘합의 이행’ 강조는 대남·대중 메시지” 분석
2015-08-30 11:08:26 2015-08-30 11:08:26
이명박·박근혜 정부 7년 반 동안 남·북이 일궈낸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는 ‘8·25 고위당국자 합의’ 발표 엿새째인 30일까지 나타난 남·북 양측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북한은 최고지도자가 직접 나서서 ‘합의의 결실을 보자’고 강조하며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반면 남한 정부 안팎에서는 ‘남북관계 속도조절론’이 대세를 이룬다.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 상황을 극적으로 해소시킨 남북관계가 또 다시 ‘가다 서다’를 반복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8·25합의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28일 <조선중앙통신>에 보도된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발언으로 완전히 정리됐다. 김 제1비서는 27일 열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 중앙군사위 확대회의에서 “이번 접촉 결과는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고 평화를 귀중히 여기는 숭고한 이념의 승리”라고 평가하며 “우리는 운명적인 시각에 화를 복으로 전환시킨 이번 합의를 소중히 여기고 풍성한 결실로 가꾸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 제1비서는 “북남 고위급 긴급 접촉에서 공동보도문이 발표된 것은 첨예한 군사적 긴장 상태를 해소하고 파국에 처한 북남관계를 화해와 신뢰의 길로 돌려세운 중대한 전환적 계기로 된다”고 말했다.
 
앞서 북한은 고위당국자 접촉이 타결된 25일 오후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을, 27일에는 김양건 노동당 비서를 언론에 등장시켜 합의 이행의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그런 상황에서 김정은 제1비서가 직접 나와 합의 이행을 재차 강조하고, 나아가 ‘북남관계 전환의 계기’라는 더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에 따라 향후 북한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각종 대화를 제의하며 상황을 주도하려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북한의 태도 변화는 현실에서 곧바로 나타났다. 남측의 국방부 관계자가 지난 27일 ‘적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징후가 보이면 핵무기 승인권자를 제거한다’는 이른바 참수작전을 언급한 데 대해 북한이 대남 선전용 사이트 ‘우리민족끼리’의 논평으로만 비난한 것이 대표적이다. ‘최고존엄’이라 부르는 김정은 제1비서에 대한 참수를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당국의 공식 성명을 발표해 강하게 반발하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또 북한은 29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실무접촉을 내달 7일 판문점에서 갖자는 남측의 하루 전 제안을 수정 없이 동의해왔다.
 
박근혜 정부와의 대화는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해 왔던 북한은 왜 대화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까.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고위당국자 접촉 과정에서 남측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북한이 ‘가능성’을 봤을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와도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어느 정도 진전시킬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봤을 것이고 상부에도 그렇게 보고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또 “중국이 북한에 ‘충돌을 피하고 대화하라’는 압력이나 권고를 물밑으로 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북한 입장에서는 향후 남북관계가 다시 나빠져도 ‘남쪽이 협조하지 않아서 나빠졌다’고 중국에 항변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측에서는 10월 중순 쯤 열리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북한의 진정성을 우선 확인한 후에 다음 스텝을 밟아야 한다는 속도조절론이 우세하다. 지난 27일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는 “향후 후속조치를 우선순위에 따라 차분하게 추진하기로 했다”고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민 대변인은 또 “협상은 끝난 게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이라며 “남북간의 협상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니까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청와대) 내부 기류가 있다”고 전했다. 5·24조치 해제나 다른 당국회담, 정상회담 등이 머잖아 이뤄질 것처럼 얘기하는 낙관론에 제동을 건 셈이다.
 
그런가 하면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약속한 8·25합의의 흐름과 맞지 않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국방부 관계자의 ‘참수작전’ 언급이 있던 27일에는 한·미 군 당국이 한반도 유사시를 가정한 새로운 ‘작전계획(작계) 5015’를 작성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작계 5015는 북한의 국지도발 때부터 한미연합방위체제를 가동하고 대량살상무기(WMD) 사용 징후가 포착되면 사실상 선제타격하는 방안 등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가 지난 6월 이 작계에 서명한 사실을 8·25합의 이틀 뒤에 공개한 것은 남·북의 합의에 불만을 가진 보수층을 고려한 조치일 수 있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이번 합의 이행에 대한 남측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28일 역대 최대 규모의 통합 화력훈련을 참관하기도 했다.
 
남측에서 ‘숨고르기론’이 나오는 한편 합의 정신과 다른 움직임마저 나타나면서 북측에 혼란스러운 신호를 보낸다면 남북관계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2월 1차 남·북 고위급접촉과 이산가족 상봉 행사 이후, 그리고 10월 인천아시안게임 때 북측 고위 인사들이 내려와 2차 고위급접촉을 갖기로 약속한 이후의 상황처럼 대화 모멘텀을 살리지 못하고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내정치적인 위기에 몰려 북한 문제를 위기 탈출의 수단으로 삼으려 할 경우 8·25합의로 마련된 남북관계 전환의 계기가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
 
 
박근혜 대통령이 28일 오후 경기도 포천 승진 과학화훈련장을 방문해 통합화력훈련을 참관하기에 앞서 ‘타우러스 미사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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