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축구 팬들에게 스포츠 시뮬레이션 게임 '풋볼매니저(FM)'는 악마의 게임으로 불린다. 한 번 손을 대면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해서 붙은 별칭이다.
이 게임의 참여자는 직접 축구 경기를 하지 않는다. 감독 역할만 할 뿐이다. 그런데도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 매번 새 시리즈를 내놓을 때마다 날개 돋친 듯 팔린다. 국내에서는 'FM 폐인'이란 말이 돌 정도다.
축구가 삶의 일부인 유럽에서는 더한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 유럽판 'FM 폐인'들은 법원에서도 인정하는 이혼 사유로 알려졌다. 남편이 FM 폐인일 경우 그 가정은 합리적인 이혼이 가능하단 소리다.
이런 현상의 이면을 살펴보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축구 감독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이 환상은 단순한 상상의 차원을 넘어 실제 자신이 감독이 됐을 경우의 전략에 대해서까지 상정해보게 한다.
실제 FM은 전 세계 여러 국가에 흩어진 축구 스카우트들이 유망주 발굴에 활용할 정도로 사실적인 데이터를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다.
◇축구 감독 게임인 '풋볼매니저' 광고. 사진/풋볼매니저 홈페이지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현실 속 축구 감독의 고충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감독실에 수북이 담배를 쌓아둔 감독, "오래 못하는 일"이라고 사석에서 슬쩍 말하는 감독들도 많다.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와 비교하면 현재 이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축구 감독이라면 경기 전후를 막론하고 수많은 미디어의 눈길을 버텨내야 한다. 심지어 경기에서 완패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더라도 카메라와 취재진 앞에 서서 무슨 말이든 뱉어야 한다. 그게 프로스포츠에서 팬을 향한 예의이자 서비스라고 인식돼 있으며 실제 각 리그 규정을 보더라도 인터뷰 참가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감독의 수명은 짧다. "오래 하면 병 걸리는 일"이라고 감독들이 푸념하기에 앞서 애초 계약 기간 설정이 무의미할 정도로 확확 바뀐다. 풍성한 검은 머리를 자랑하던 감독이 오래지 않아 희끗희끗한 머릿발을 날리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감독협회(LMA)가 지난 1월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지난 시즌 기준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감독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1년292일이다. 특히 계약 기간과 관계없이 경질당한 감독만 27명인데 따져보면 두 시즌을 채 못 넘기고 물러난 것이다.
물론 아르센 벵거(아스널) 감독 같이 19년째 한 팀을 맡은 감독도 있다. 하지만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타팀 감독을 보면 전부 재임기간에서 '고만고만하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다.
2012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에디 하우(본머스) 감독을 시작으로 2013년부터 팀을 이끈 로베르토 마르티네스(에버튼), 마크 휴즈(스토크시티), 마누엘 페예그리니(맨체스터시티), 조세 무리뉴(첼시) 정도가 그나마 이름 좀 들어본 감독이다. 나머지 EPL 감독들은 지난 시즌 부임했거나 대부분 올해 새로 팀을 맡았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2011년부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지휘하고 있는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프리메라리가 내 최장기 재임 감독이다.
'엘 클라시코'로 유명한 두 팀을 보면 라파엘 베니테스(레알 마드리드) 감독은 지난 6월 부임했다. 루이스 엔리케(FC바르셀로나) 감독은 지난해부터 스타 군단을 이끌고 있는데 오래갈 것이란 예상을 하긴 어렵다.
◇대표적인 '장수 감독'으로 불리는 아르센 벵거 아스널 감독. 사진/아스널 홈페이지
국내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최상위 리그인 K리그 클래식(1부리그)의 감독 부임 기간을 종합해보면 대표팀을 잠시 다녀온 전북 최강희 감독(2005년), 포항 황선홍 감독(2010년), 서울 최용수 감독(2011년), 수원 서정원 감독(2012년) 정도가 팀을 자기 색으로 만들 기간을 보장받았다. 그마저도 황선홍 감독은 올 시즌을 끝으로 물러난다.
그 다음으로는 성남 김학범 감독(2014년)과 2014시즌 챌린지(2부리그)에서부터 지휘봉을 잡아 클래식으로 올라온 광주 남기일 감독이 있다. 나머지는 모두 올해 부임한 신임 감독이다. 축구에 죽고 사는 유럽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파리 목숨"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다.
감독들의 짧은 수명을 해석하는 시선은 여러가지다. 하나만 꼽자면 특정 팀이 승승장구할 경우 다른 팀들이 그 팀의 전술에 대응하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게 대표적이다. EPL의 경우 2009년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3년 연속 우승 이후 연속 우승을 달성한 팀이 없다.
K리그도 전북이 올해 2년 연속 우승한 게 사상 첫 연속 우승 사례다. 어느 한 팀이 꾸준한 성적을 내기 어려운 환경에서 구단 수뇌부들은 손쉽게 체질 개선을 시도할 방법으로 감독 교체라는 수를 둔다.
평소 언론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한 무리뉴 감독은 과열된 축구 문화를 꼽기도 했다. 그는 지난 4월 영국 언론 텔레그래프를 통해 "나 또한 축구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 그렇지만 축구가 삶의 모든 것이 되는 건 정말 큰 문제"라며 "특히 팀이 졌다고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건 축구의 영향력이 큰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과열된 축구 문화가 비정상적인 일들을 만들어 낸다는 다소 강한 발언이었다.
이는 무리뉴 감독이 지난 시즌 첼시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 뒤 한껏 자신감이 찼을 때의 얘기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연신 성공했던 그가 다시 한 번 EPL 우승을 맛본 뒤 호기롭게 한 말이라 당시 큰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무리뉴 감독도 지금은 EPL 16위에 처져있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경질설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 시즌 우승팀 감독이자 자신을 특별하고 뛰어난 존재인 '스페셜 원'이라고 불렀던 사람이 불과 몇 달 만에 추락한 것이다.
그의 전술이 간파당했다는 평가부터 선수들 장악에 실패했다는 말까지 그와 첼시의 부진을 두고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다. '파리 목숨'과도 같다는 감독직을 향한 비유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이라는 그에게까지 뻗치고 있는 셈이다.
임정혁 기자 komsy@etomato.com
◇성적 부진으로 위기에 몰려 있는 조세 무리뉴 첼시 감독. 사진/첼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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