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6일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7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응답으로, 미국이 요구하는대로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라는 위험한 카드에 동의한 한국정부가,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10일에는 '별 고민 없어보이게도'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점입가경이다. 북한당국이 공단폐쇄와 자산동결로 맞받아치니 결국 누가 더 실(失)이 클 것인가?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을 울리고 한반도 상공에서 미사일이 요격되는 것을 허락한 현 정부의 판단력이 심히 우려스러운 늦겨울이다.
'빨리빨리' 정책?
며칠 전 TV 뉴스화면에 잡힌 개성공단 철수 트럭들에 실린 보따리들, 심지어 삐죽이 나온 이불은 피난민 행렬을 연상시켰다.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이들의 현실과 근심어린 모습을 보니 착잡하기 짝이 없다. 한 때 정부의 독려에 의해 입주했던 기업들이 2월11일부터 공단 가동을 중단한다는 정부의 발표를 하루 전인 10일에 듣고, 또한 13일까지 철수하라고 지시받는, 그야말로 초스피드의 과정이다.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아니 설령 작은 가게나 가정집이라 할지라도 이사 한 번 가려면 몇 주 전부터 신경 쓰이고 최소한 일주일 전부터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할 터인데, 하물며 기업들에게 철수준비를 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은 정부의 결정은 바로 다음날 북한이 아예 공단폐쇄와 즉각 추방을 결정함으로써, 제품도, 자재도, 설비도 모두 남겨둔 채 떠나게 된 입주기업들의 피해와 관련자들의 절망감만 가중시켰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성명을 통해 "개성공단에 있는 남측 기업과 관계기관의 설비, 물자, 제품을 비롯한 모든 자산을 전면 동결한다"고 선포한 11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CIQ)를 통해 개성공단 근로자들이 전원철수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월1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발표된 '입주기업 비상총회 결의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2013년 3차 핵실험 이후 가동이 중단되었다가 남북 양 당국이 8월14일 개성공단을 재가동하기로 합의한 내용 '개성공단의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 제 1항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의 영향을 받음이 없이 남측 인원의 안정적 통행, 북측 근로자의 정상 출근, 기업재산의 보호 등 공단의 정상적 운영을 보장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마땅히 지켜야 한다. 정부의 약속을 믿고 박근혜 표 개성공단인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를 위해 매진해온 우리에게 정부는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시간적 말미도 주지 않았다."
1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개성공단 기업협회 비상총회에 참석한 입주자 대표들이 정권섭 회장의 모두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근혜 정부의 조급하고 독단적인, 신중하지 못한 결정으로 인해 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의 위협에 처했고 그 협력업체들의 피해도 크다. 그리고 북한의 맞대응에 의해 10여년간 우여곡절 속에서도 남북한 경제협력의 구심점 역할을 해오던 평화의 공간은 이제 '군사통제구역'이 되었다.
구두쇠, 조선 상업의 힘!
<만인보>에는 '경제'라는 키워드로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시들이 몇 편 있는데, 고은시인의 경제사적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시도 있다. "조선 철종 때 / 한양성 밖 장단 지경에 / 김구두쇠가 있었것다 / 그가 장구두쇠네 집에 / 아들 시켜 장도리 빌리러 보냈것다 / 빈손으로 돌아왔것다 / 안 빌려 준대요 못질하면 장도리 닳는다고 / 그러자 김구두쇠 / 에이 그놈의 영감 구두쇠로군 / 하는 수 없다 우리집 장도리 꺼내어 오너라"('상구두쇠', 2권). 장단은 경기도 북서부에 있었던 군으로, 먼저 38선에 의해 갈라지고 한국전쟁 이후 일부는 남한으로, 일부는 북한으로 편입되었다.
고은시인 육필원고 <상구두쇠> 초안. ⓒ고은재단
고은시인 육필원고 <상구두쇠> 초안. ⓒ고은재단
"장단에서 더 가면 / 개성 구두쇠 / 거기서 더 가면 해주 구두쇠 / 개성 구두쇠는 / 오줌 팔 때 오줌에 물 타는데 / 해주 구두쇠는 / 그 오줌 살 때 / 손가락으로 오줌 찍어 맛보고 / 물 탔나 안 탔나 보고 사간다는 것이렷다 / 이런 구두쇠 여러분에 의해 / 조선 상업이 이루어져왔나니 / 그 구두쇠 온데간데없어지자 시난고난 나라 기우는 것이렷다 / 암 그렇고말고 / 구두쇠도 정기여 민족정기여"(앞의 시).
<만인보>의 시인이 익살스럽게 묘사한 바와 같이, 해주와 개성이 상업적으로 발달했던 곳임을 상기할 때, 구두쇠들의 사고방식이 상업적 마인드와도 상통하고 지역 경제의 발전에 일조했음직하다. 특히 개성(개경)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가 918년 개국한 이래 919년부터 내내 고려의 수도였고, 조선이 1392년에 세워지고 나서도 1394년 한양(한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수도였던 국제적 상업도시이니, 구두쇠에 관한 이야기들이 구전되는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고은시인은 다른 시에서 조선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 유신 72현이 그들의 자식과 손자들까지 '두문동 처사'로 만든 것을 비판적 어조로 노래하면서도, 그 대신 "여기서 개성상인도 나고 / 여기서 개성 인삼재배도 나왔"음을 강조하고 있다('두문동', 3권).
소금장수 김두원의 분투
한편, 대한제국(1897~1910) 시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눈에 띄는 상인이 한 사람 있는데, 바로 원산의 소금장수 김두원이다. 1876년 일본과 체결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항(1876), 인천항(1883)과 원산항(1880)을 개항하게 된다. "원산포 소금장수 김두원이 / 동해 장기땅 모포 김쌍둥이네 집에 / 소금 1천88통 쌓아두고 있었다 / 왜놈 둘이 배 타고 왔다가 / 그 소금더미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 김두원에게 / 울릉도로 싣고 가 내자 했다 / 소금값 배를 받을 수 있다 했다 / 왜놈 배에 소금 싣고 / 바다 건넜다 / 울릉도 도동 하룻밤 자고 나니 / 소금 실은 배 사라져버렸다"('소금장수 김두원', 3권).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소금 도매 거상 김두원은 1899년 경상도 울산 마평에서 소금 1088통을 5천1백99원10전(황성신문 1906년 10월26일)에 매입해 원산으로 가져가기 전 장기군 모포(현재 포항)에 적치해 두었다. 그런데 시네마현 출신의 기무라(木村) 형제가 울릉도에 어업이 성황이니 소금을 가져가 콩으로 바꾸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고 그를 속여 울릉도로 가게 한 뒤 김두원이 배에서 내린 사이 소금을 실은 배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김두원은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공사관에 청원서를 제출하지만, 일본 외무당국은 가해자가 이미 사망했고 그의 동생이나 상속인은 배상 의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재산이 없어 배상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일본 공사관측은 김두원에게 약간의 구휼금을 제안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일본정부의 배상을 요구하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902년 충남 홍주군 장고도에서 일본 범선이 바윗돌에 부딪혀 부서졌을 때 그 바윗돌이 조선의 것이라 하여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3천환을 받아가고, 1904년 공주군에 머물던 일본상민이 대한제국 군인과 시비를 하다가 구타당했다고 5천환을 정부로부터 받아갔으니 자신도 일본정부로터 배상받아야 한다는 것이다("김씨의 정론",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20일).
1903년 하야시 공사에게 항의하다가 공사의 인력거가 쓰러진 일로 감옥살이를 한("김씨원억", 대한매일신보 1904년 9월14일) 김두원은 1907년에도 전(前) 공사 하야시에게 "직소"라는 두 글자를 써 들고 호소하고("염상의 호소",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10일), 이로 인해 세 달 후 10월에 일본의 황태자가 방문할 때는 아예 미리 감옥에 갇히게 되는 등("무슨 죄인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7일) 수난을 거듭하게 된다. 탄원서 투쟁을 끊임없이 지속하던 그는 여러 해 동안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등장하다가, 마침내 1920년 동아일보사에 자신이 직접 찾아가 하소연한 소식이 5월17일자에 실리는 것을 끝으로 소식을 알 수 없게 된다. 매일신보 1917년 11월20일자에는 그가 구휼금 300엔을 받은 것처럼 나오지만, 동아일보사에 찾아가 투쟁을 지속하고 있음을 알린 게 1920년인데다가,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만인보>는 이 집념의 상인 김두원이 20여 년에 걸쳐 홀로 분투하는 동안 "때로는 구속되고 / 때로는 귀양살이 / 때로는 추방당하며 / 산비탈 개울가에 자며 / 그의 가족 넷이 굶어죽을 지경 / 나머지는 흩어져 거지가 되었"던 비참한 현실을 서술한 뒤 다음과 같이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 소금은 / 본디 원산객주 여러 사람 자금이었다 / 그것을 찾아야 했다 / 쉰 살의 소금장수 / 일흔 살 넘도록 / 20년 이상을 청구운동 벌였다 / 그러다가 / 일흔한살에 조선총독부에 굽히고 말았다 / 어디 염전이나 하게 해달라고 / 제물포나 / 전남포나 군산 소금전매권이나 달라고 // 사람들이여 소금장수 김두원의 최후를 욕하지 말라 / 장사꾼이 20년 고생 감당한 것은 / 소위 선비의 일생 이상이므로 / 그 이상이므로 / 그 이상이므로"('소금장수 김두원', 3권). 다시 한번 1920년의 동아일보 기사를 생각할 때 그가 마지막에 총독부에 굽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71세가 되도록 투쟁하며 장사꾼이 20여년의 고생을 감당한 것은 실로 "소위 선비의 일생 그 이상"이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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