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대 세시기 중 유득공(1749~1807)의 <경도잡지>와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는 탕평채를 설명하면서 요즘과 같은 봄날 밤 혹은 저녁에 먹기 좋다고 쓰고 있다. 탕평채는 흔히 영조가 붕당들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기 위해 탕평책을 제안하는 자리에 처음 등장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재삼(1808~1866)의 <송남잡지>(1855년)는 영조 때 좌의정 송인명이 젊은 시절에 가게를 지나가다가 탕평채 파는 소리를 듣고 사색을 섞어 등용해야 함을 깨달아 탕평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전하고 있어, 탕평책과 탕평채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확실치 않다.
백운의 삶, 풍류가객 백호 임제(1549~1587)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배웠음직한 시조들 가운데 임제가 황진이를 추모하며 쓴 다음의 시가 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난다. /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무텻는다. / 잔(盞) 잡아 권할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대문장가이자 풍류시인으로 유명한 임제는 선조 9년(1576년)에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병마사·예조정랑 등을 거쳐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를 지냈으나, 당시 정계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여생을 보냈다. 관직에 나가 입신양명하는 것을 청운(靑雲)으로, 세속을 벗어나 산수를 즐기며 국외자의 삶을 사는 것을 백운(白雲)으로 상징할 때, 임제는 청운에서 백운으로 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만인보>는 그를 이렇게 노래한다. "당쟁판 엎치락뒤치락 그놈의 벼슬 등진 조선 백운파에게도 / 살 까닭이 왜 없으리오 / 휘파람이나 불고 다니는 천치바보라 자칭한 임제에게 왜 없으리오 / 서도병마사 부임차 가다가서리 / 기생 황진이 무덤 찾아 자는다 누웠는다 / 기생 치맛자락 따위 애도해 마지않는 시 지어 바치고 / 그 무덤가에서 / 한잔 술 기울인 죄목으로 / 임지 당도하기도 전에 파직당한 백호 임제에게 / 남은 건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임제', 1권).
백호 임제 문집 재해석에 몰두한 일본인 나가이겐지가 남긴 연구자료. 사진/뉴시스
사대부가―그것도 벼슬을 받아 부임하는 길에―기생 무덤에 잔을 올리고 시를 지어 그를 추모하였으니 당시로서는 파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칼과 거문고를 늘 지니고 다녔다는 임제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과 같은 상태임을 통탄하며,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는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은 아까울 게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자식들에게 “나 죽거든 곡을 하지 말아라 하고 / 서른아홉살 뜬구름 백호 임제”가 세상을 뜨는데 "이 땅덩어리 좁다 하고 큰 세상 태어나야지 하고 가고 말았"다(앞의 시).
백호 윤휴(1617-1680)
그로부터 몇십 년 후 당파싸움은 더욱 심해진다. 임제와 같이 백호(白湖)를 호로 사용하는 유학자 윤휴는 주자의 성리학에 도전장을 내미는 파격을 감행함으로써 주자를 신봉하는 골수 성리학자이자 서인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미움을 사게 된다. 윤휴는 "경전의 깊은 뜻을 어찌 주자만 알고 우리는 모른단 말인가?"라고 항의하며 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심성이란 기(氣)의 작용일 따름 / 기가 형체로 하여금 일어남이 곧 / 심성이라 / 사람의 정(情)도 심성이 물(物)과 만나 / 일어남이라 // 이기일원론 과감하도다 불온토다 // 감히 주자성리학의 주리설 / 맞서다니 // 오싹오싹하도다 // … / 신동 윤휴 // 저 속리산 복천암에서 / 송시열과의 격론 3일 뒤 / 송시열이 자탄하기를 / 내 독서 30년이 참으로 가소롭구나 / 이렇듯이 / 서인 노론과도 더불어 놀다가 / 기어이 / 예송(禮訟)으로 틈 벌어져 / 남인이 되고 말았다 // 조선 후기 / 임진정유 왜란 뒤 / 병자호란 뒤 / 초야에 묻힌 신동이더니 // 주자 살아오면 / 내 주장 속 좁아 받아들이지 못하나 / 공자 살아오면 / 내 주장 옳도다 옳도다 할 것이야 // … // 바야흐로 백호 윤휴 떨쳐일어나 조선 후기 권세 지속의 본처 거슬러 / 주자주의 거슬러 / 그놈의 주자 장구(章句)를 마구잡이로 뜯어고쳤다"('백호 윤휴', 27권).
당색을 초월한 친구였던 백호 윤휴와 우암 송시열은 1차 예송논쟁(1659년)때 사이가 벌어져 종국에는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규탄하고 흑수(黑水)라 칭하게 된다. 이는 윤휴가 주희의 학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오류를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형에 처하려 하는 남인인 윤선도와 허목의 편을 들자 그와 아예 원수가 돼버린 것이다. 윤휴와 송시열은 학문적 입장과 당색을 달리 했지만, 청에 대한 북벌론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역시 입장의 차이가 엿보인다. 송시열의 경우, 북벌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양민이 우선이니 기강을 진작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군주의 사치를 억제해야 한다는 점, 민생안정이 이루어지면 양병도 따라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윤휴의 경우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이어서 북벌을 위해 군권(軍權)을 통합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설치와 전차의 제조를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양반에게도 병역을 부과하고 호포를 거둘 것, 신분에 따라 다른 재료를 사용하던 호패를 모두 종이로 만들어 신분간 위화감을 없애 전투에 유리하게 할 것 등의 의견을 냈으나 모두 거부당한다. "또한 현종 15년 / 밀소를 올려 / 북벌을 주장 / 포병 10만 길러 북을 치라는 / 선왕 효종에 이어 / 병정 1만대 뽑아 / 청을 치고 / 저 남해 대만 정경(鄭經)과 함께 / 수군으로 / 청 본토에 오르자는 것 / 이 주장과 함께 / 양반도 군포 내게 하자는 것 // 이에 이르자 / 노론이 윤휴 사사(賜死)를 윽박지르니 / 숙종 6년 사약 사발 앞에서 // 나라에서 어찌 선비를 죽이는가 / … // 절대 타파의 뜻 백호의 뜻 / 비록 / 몸은 쓰러졌으나 / 뜻은 푸르렀다 붉었다 희고 검었다"(앞의 시).
사색당파의 색을 사방위신(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에 근거해 동인-푸른색·서인-흰색·남인-붉은색·북인-검은색으로 볼 때,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암시적이다. 윤휴는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 집안 출신으로 처음에는 서인과도 어울려 지냈고 결국 남인 쪽으로 갔으나, 그가 북벌론과 관련해 건의한 내용들은 남인들에 의해서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윤휴가 중용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 오류가 있음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자, 송시열은 1653년 서인학자들과 논산의 황산서원에 모여 논의를 한다. 처음에는 윤휴의 주장을 학문적 이설로 받아들여 설득하려고 노력하던 송시열은 결국 그와 정적이 되고 말지만, 1659년 윤휴를 경연관의 적임자로 추천하는가 하면, 1674년 윤휴가 허적과 함께 북벌론을 추진하자 당시 유배 중이던 상황 속에서도 그를 지원하라는 글을 문하들에게 써 보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만인보>는 송시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8백88책에 / 그 이름 3천번 이상 나오는 사람이 / 오직 우암 송시열이라 하여라 지긋지긋하여라 / 네 임금 내내 주자학의 종장이요 / 당쟁의 중추요 / 그리하여 조선 수구주의 노론의 개조인지라 // 이른바 3백년 동안의 정기가 뭉쳐 / 그가 송시열인바 / 큰 물건은 과연 큰 물건인데 / 왕실 예론 당쟁에나 쓰이고 만 작은 물건인지라 // 허나 사약 받아 마시고도 죽지 않아 / 다시 받아 마시고 쓰러진 팔십 노구의 기상인지라 // … // 태몽도 공자가 제자 거느리고 오는 꿈이었는지라 / 그런 태몽 꾸고 태어난 사람이 / 장차 송시열이매 / 그의 시대에 / 그가 태어났건만 / 다른 시대였다면 / 율곡 이이의 요절을 메운 / 거유이었을진대 / 거기에 우암을 애석해하는 바 없지 않음인지라"('송시열', 9권).
우암 송시열의 청천문필. 사진/뉴시스
초기의 붕당정치는 외척과 공신 집단의 횡포를 견제하고 정치세력들 간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긍정적 기능이 있었으나 차츰 변질돼 폐해를 낳더니 결국 정조 이후 붕괴되고 세도정치로 넘어가게 된다. 세도정치의 썩은 물속에서 조선 왕조의 몰락은 예견된 셈이다. "조선 후기 사색당쟁 / 동인 서인 / 남인 노론의 세력이 다 공자의 제자였으니"('송시열의 종', 11권), 공자의 나라보다 더 공자를 따르던 조선 오백년의 역사, 그 역사를 물려받은 우리의 현재는 어떠한지.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